모두 다 사랑이야!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615회 작성일 23-12-24 13:34본문
모두 다 사랑이야!
요3:16
2023. 12/24. 11:00(대강절 넷째 주일)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도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구는 교회로 가고, 누구는 홀로 기도하고, 누구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또 누구는 신학을 공부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노력의 흔적을 흔히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운동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바위산 꼭대기, 사막 한복판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성지순례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일상생활을 떠나 수도생활을 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다음으로 선택한 것이 성지순례였다. 그래서 돈을 모아 성지순례를 평생소원으로 여긴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들에게 복음을 들려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다. 그는 서민을 계몽할 목적으로 주옥같은 단편소설을 썼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르쳐주는 내용이 많다. 그의 주장은 주님은 험산준령 깊은 산속이나 사막 한복판에 계신 것도 아니고, 반드시 성지순례를 가야 만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구두장이 마틴의 이야기다.
마틴이라는 구두장이가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다. 5년 전에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에 하나 남은 막내까지 병으로 죽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고 읽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삶에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되찾아 성경읽기에 열중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틴, 내가 내일 찾아 갈테니 창밖을 보아라.’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기다렸다. 기다려도 오신다는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창밖에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마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다. 청소부를 내보내고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을 대접하고 옷을 주었다. 또 시간이 흘러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사과를 파는 할머니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치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 값을 대신 갚아주며 할머니가 소년을 용서토록 권유하여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때, 어둠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할머니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그는 꿈에서 깨어나 펼쳐져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었으니...네 형제 중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이는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로, 뒤늦게 구원의 감격을 깨닫게 된 마틴이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하루 동안 겪은 이야기다. 주님을 만나는 비결은 연구에 있지 않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우리가 매일 톡으로 만나는 사람들, 바로 그들과 사랑으로 만남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사랑하사
아제개그에서 글자 줄이는 놀이가 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네 글자로 줄이면? ‘인물탄생’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네 글자로 줄이면? ‘인구증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사건을 네 자로 줄인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사’ 성탄은 사랑하사 생긴 사건이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우리를 ‘사랑하사’, 나를 ‘사랑하사’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 본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 그리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신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랑하사’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 외아들을 보내시고,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니 성탄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유 말고는 주님의 탄생을 해석할 어떤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성탄의 가장 중요한 의의, 혹은 의미는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네 번째 주일이 사랑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미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특징
할 필요가 없는데,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전적으로 그를 위해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이다.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내어주시는’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보내셨고, 또한 비참한 일생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신 사랑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이다.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주셨으니’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 ‘디도미’(δίδωμι)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단어는 ‘보내다’(send), ‘넘겨주다’(hand over), ‘내어주다’(give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희생적인 일생을 보내신 예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목을 메이게 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랑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그토록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다.
다음은, 일방적으로 먼저 주어진 ‘선수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태도나 하는 것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그 어떤 것도 한 적이 없는데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일에 대한 어떤 대가나 보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먼저’ 주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다 흉악한 죄인이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자격도 조건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사랑해주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20대 때 이 사랑을 깨닫고 너무 감사해서, 너무 죄송해서 통곡을 했다. 지금도 이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계3:20절 말씀을 묵상하다 깨닫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셨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10여 년을 문밖에 서계시게 했다(중1에 주님을 영접했으니). 이에 대한 자책과 함께 먼저 찾아오셔서 10여 년을 기다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복받쳤다. 이와 같은 주님의 선수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무슨 수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가 있었겠는가!
또 하나는, 쏟아 부으시는 ‘풍성한’ 사랑이다. 본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주셨으니’ 라는 단어를 어떤 분이 ‘샤워하다’(shower)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았다. 대개 샤워하면 몸을 씻는 것 정도로 연상하지만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뜻한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온몸이 흠뻑 젖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샤워다. 본문의 ‘주셨으니’ 라는 단어에 이와 같은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외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람은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쏟아부어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풍성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이 주어지겠는가? 그렇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 때문에 21세기 동북아시아 변방에 있는 대한민국, 거기서도 남도 끝자락에 살고 있는 우리까지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여간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 사랑의 풍성함에 대한 확증이다.
빚진 자
주님은 이 세상에 소망의 빛, 평화의 빛, 기쁨의 빛으로 오셨다. 또한 사랑의 빛으로 오셨다. 이와 같이 빛으로 오신 주님의 최대 수혜자는 우리다. 특히 우리는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 어떤 자격도 조건도 없이 먼저 베풀어주신 주님의 선수적인 사랑,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쏟아 부어주시는 풍성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시는 사랑을 받은 우리다. 신앙생활은 이런 사랑을 알고, 이에 보답하는 것이다. ‘베풀어주신 사랑이 이토록 크고 많은데, 이를 어떻게 보답할까?’ 이런 고백과 태도에서 경건한 신앙생활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고백과 태도를 빚진 자의 고백, 혹은 빚진 자의 태도라고 한다. 이런 ‘채무의식’(빚진 자로서의 의식)이 곧 경건의 척도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빚지고 살다가 죽는 존재다.’ 그렇다. 인간은 의존된 존재이기에 한 평생 빚을 짊어지고 살다가 죽는 존재다. 무엇보다도 성도는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다. 그러므로 빚진 자로서의 의식(채무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 구두장이 마틴처럼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따뜻한 온정을 베푸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소망으로, 평화로, 기쁨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오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고, 베풀어주신 사랑의 빚을 갚은 것이다. 내일은 성탄절이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망극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성탄을 준비하고, 성탄감사 예배를 드리고, 성탄절을 보내자. 그리고 이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지 기도하고 결단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ENC3ExU6M5Q 1618회 연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