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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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721회 작성일 23-10-08 12:50본문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눅12:33~34
2023. 10/8. 11:00(성령강림 후 열아홉 번째 주일)
재물과 영생의 사이에서
복음서를 보면,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주 나온다. 이렇게 재물과 관련된 말씀이 자주 나온 것은 재물이 인간의 주요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재물관리가 영혼관리와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재물과 천국(영생)과의 연관성’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곳이 누가복음이다. 어리석은 부자비유(12장)를 비롯하여 부자와 나사로 비유(16장), 부자청년(18장), 그리고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19장)가 대표적이다. 이 말씀 모두가 영생(천국)과 직결되어 있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대부분의 사람이 선망하는 부자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만 쌓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이들에게서 하나님과 이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들 중에서 삭개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재물을 모으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그렇게 모은 많은 재물이 장애가 되어 영생에서 제외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역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 돈의 사용가치가 끝없이 확장된 물질만능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은 단순히 교환가치를 넘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심지어 생명도 연장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돈에 집착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이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돈은 신적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와 불안의 대상인 죽음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질만능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물질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맘몬’(재물의 신)이 되었고, 심지어 성도의 마음까지 점령하여 목적지가 천국이 아니라 이 땅이라고, 영생이 아니라 찰나적인 즐거움과 쾌락이라고 속삭인다. 그렇지만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은 물질이 결코 영생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점이다. 설령 몇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이 세상은 반드시 끝이 있다. 천국만이 영생만이 영원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천국을 대신할 수 없고, 영생을 대신 할 수 없다. 그러니 진짜 보물은 천국이고 영생이다. 그러므로 항상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나의 마음과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 땅인가? 천국인가? 늘 자신을 성찰하면서 삶의 방향이 천국을 향하도록, 영생을 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낡아지지 않는 배낭
본문 역시 모든 사람이 민감하게 여기는 재물, 곧 재물과 영생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 혹은 부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교훈하는 말씀이다. 정확히 말하면 재물이 영생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재물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말씀이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33). 주님은 여기서 재물의 올바른 사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 곧 재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나의 재물이 필요한 그를 위해, 그의 육체와 영혼을 얻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복음서 중에서 어려운 이웃에 관심이 많은 누가는 이를 구체적으로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제가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 곧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이다.
성경에 구제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요즘은 구제란 말 대신 나눔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구제는 주는 사람의 입장이고, 나눔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동시에 고려한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나눔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나눔은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관심이고, 나눔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세워주기이기 때문이다. 나눔은 머리의 인식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고, 나눔은 서로의 선을 긋는 단절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눔을 선뜻 실천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나눔을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 지갑을 열어야 하고, 내 소유를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눔은 나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쌓는 것이다.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나눔의 역설이고, 실천하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본문은 나눔을 ‘낡아지지 않는 배낭’이라,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나눔의 특징과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나눔은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이고,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정함이 없는 물질을 하늘에 쌓은 보물이 되게 만드는 비결이다. 장래에 자기를 위한 좋은 터를 쌓는 일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방법이다. 즉, 영생을 위한 보험과 같은 것이 나눔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심’(마음)과 ‘시선’(관점)을 바뀌게 만드는 것이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나누는 곳으로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향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정성도 시간도 물질도 투자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런 것을 투자한 것에 항상 관심과 시선을 두게 된다.
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다.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간암말기라고 했다. 앞으로 두 달 밖에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았지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남은 두 달을 어떻게 보낼까 곰곰이 생각했다. 한 번도 하나님께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물질로 하나님께 헌신했다. 그리고 처녀시절 은혜 받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는 선교는 못해도 보내는 선교라도 하겠다고 했으나 이것 역시 지키지를 못했다. 그래서 늘 기도하던 선교사에게 선교헌금을 보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과 남편에게 유서를 썼다. 미웠던 사람에 대한 미움을 털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했다.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에게 전도도 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두 달이 금방 지나갔다. 죽을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오히려 힘이 났다. 다시 병원에 찾아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난처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오진을 한 것 같습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암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보였다. 의사가 오진을 했는지, 그 사이에 기적으로 병이 나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오진을 했다 해도 의사가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오진으로 마음고생을 그토록 많이 했는데, 의사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분이 말했다. ‘저에게 지난 두 달처럼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이 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분은 지난 두 달 동안 그의 관심과 시선이 바뀐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로 채워지고, 시선은 영원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늘에 보물을 쌓았기 때문이다. 나눔이 중요한 것은 작은 나눔의 실천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눔을 실천하는 당사자의 관심과 시선을 바뀌게 만들기 때문이다.
포모 증후군(FOMO Syndrome)
지금 우리는 유혹의 시대를 살고 있다. 주변엔 무수한 행복(?)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새로운 옷과 좋은 차를 사면, 화려하고 멋진 집에 살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여행지를 가면, 누구나 쉽게 행복에 도달할 것처럼 유혹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것을 아무리 빨리, 그리고 많이 성취해도 쉽게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쳇바퀴를 도는 일과 같아서 눈앞에 행복처럼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좇아도, 결국 남는 것은 더 좋은 기회를 놓치고 흐름에 뒤처질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포모 증후군’(FOMO, Fear Of Missing Out)이라고 한다. 문제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꾸역꾸역 채워 넣지만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불안과 불만이 점점 커만 가고 있다. 이것이 풍요의 과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욕심만 채우려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누지 않고 움켜쥐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눌 때 비로소 이웃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만족한 삶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소외나 뒤처지는 두려움이 자리할 수가 없다.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이란 시가 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시인은 벌레 먹은 나뭇잎이 ‘예쁘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이고,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남을 먹여가며 살다보니 구멍이 숭숭 뚫렸는데,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디 하늘뿐이겠는가? 주변의 나무도 나뭇잎도 산도 들도 보이고, 그곳으로 햇빛이 통과하고 빗물도 통과하여 주변을 더욱 이롭게 만든 것이다. 섬기고 나누는 삶이 이와 같다. 자신도 주변도 하늘이 열리도록 만들어주고, 은혜의 햇빛과 축복의 단비를 통과시켜 자신과 주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가 벌레 먹은 나뭇잎이 되었으면 좋겠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아름다운 흔적을 가진 성도,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 하늘을 열리도록 만들어주고, 은혜를 햇빛을 통과시키고 축복의 단비를 통과시키 주변을 풍성하게 아름답고 이롭게 만들어주는 성도,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정함이 없는 재물로 관심과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참된 생명을 취하게 하고,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m7nuZKt_Rf8 3471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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