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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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383회 작성일 23-08-27 14:54본문
껍데기는 가라!
눅12:1~3
2023. 8/27. 11:00(성령강림 후 열세 번째 주일)
디폴트 벨류(Default Value)
국가나 기업의 금융위기, 경제적 위기에 자주 사용되는 말이 있다. ‘디폴트’ 혹은 ‘디폴트 벨류’란 말이다. 이는 두 가지 영역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 금융이나 경제학에서는 ‘재정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채무 불이행, 곧 부도)을 뜻하고, 컴퓨팅 영역에서는 ‘기본 값’을 뜻한다. 특히 사람에게 있어서 이 기본 값(디폴트 벨류)이 중요하다. 그것을 어디에, 혹은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과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다. 좋은 사회, 건강한 사회도 기본 값을 어디에 두고, 무엇에 두느냐에 있다.
흔히 말하기를 정직을 강조하는 광고나 말이 많을수록 역설적으로 그 사회는 정직하지 못한 사회라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많이 하고 자주 하고 강조한다.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말 1위에서 5위까지를 소개한 글이다. 1위는 ‘진짜’다. 진짜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된다. 무엇인가 신기할 때. 무엇인가 안타까울 때, 무엇인가 공감할 때, 무엇에 화가 날 때, 사실의 진위여부를 물을 때 흔히 사용한다. 또한 무엇인가를 강조할 때도 진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2위는 ‘솔직히’다. 이는 대체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3위는 ‘인간적으로’다. 4위는 ‘너무’다. 비슷한 의미로 ‘정말’이 있다. 5위는 ‘있잖아’다. 여기서 ‘진짜’와 ‘솔직히’ 라는 말이 1,2위라는 것이 씁쓸하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 가짜가 판을 치고, 신뢰와 정직이 실종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가짜, 불신, 정직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 값’(디폴트 벨류)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렇게 사회적 디폴트 벨류가 바뀌면 경제에만 디폴트(부도)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 도덕적인 디폴트(부도)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나의 디폴트 벨류가 무엇인지, 무엇에 영적 디폴트 벨류를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깊이 따져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앙은 ‘쇼’가 아닌데, 왜 ‘쇼’를 하는가?
주님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 대한 6가지 화를 선포하신(11:42~52) 후, 이를 한 단어로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외식’이다(1). 외식(ὑπόκρισις)이란 원래 연극에서 말과 행동으로 연기를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영어로 ‘쇼’와 같은 의미다. 원래는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는데, 성경에서 겉만 보기 좋게 꾸민다는 뜻으로 사용되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더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외식(쇼)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잘 보이기 위해, 돋보이기 위해서다. 이렇게 돋보이려고 한 이유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기 위해서다. 인정을 받고 영예를 얻기 위해서다. ‘그는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구제를 열심히 하는 사랑의 사람이다. 그는 금식을 밥 먹 듯하고, 기도가 일상이 된 경건한 사람이다. 항상 말씀을 입에 달고 사는 말씀의 사람이다.’ 이런 칭찬을 받고, 그래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이용한 사람이 있다. 소위 신앙을 도구화한 것이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그랬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기서 자유로울까? 사실 교회와 성도가 비난을 받거나 거부를 당한 중심에는 외식과 위선이 있다.
신앙은 보이기 위한 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주님이 아시면 족하리.’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태도다. 그런데 왜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이용하고, 신앙을 도구화한 것일까? 거룩이라는 믿음의 나무를 썩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해충과 같은 외식과 위선을 왜 일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디폴트 벨류, 곧 신앙의 기본 값이 잘못됐거나 바뀌었기 때문이다. 간혹 자신의 세속적인 야망을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리 없고, 그저 믿는 ‘척’하는 경우가 전부다. 반면에 분명히 예수님이 디폴트 벨류였고, 주님을 만난 감격스러운 경험도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성도가 여기에 속한다. 처음엔 신앙의 핵심가치(예수님을 통한 구원, 죄 사함, 영생, 하나님의 나라 등)를 기본 값으로 삼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이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탐하게 되고, 그러려면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고,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존중을 받아야하니까 외식을 하고 위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현대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로 전락한 것이다. 본문은 우리 신앙의 기본 값, 곧 영적 디폴트 벨류가 바뀌게 된 이유를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 앞에선 숨길 수가 없다.
사람은 ‘~척’하며 숨길 수가 있고, 외식과 위선으로 속일 수가 있다. 얼마든지 잘 보이도록 ‘쇼’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기도 하다. 사람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가 없다. 감추고 있으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속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2,3). 이 말씀은 감추고 숨긴 것이 언젠가는 밝히 드러나게 되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이 온 천하가 듣도록 알려지게 될 때가 있다는 뜻이다. 즉, 바리새인의 외식과 위선은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외식과 위선을 행하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 다 보시고, 다 들으시고, 다 아시는 하나님, 곧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생략되어 있다. 때문에 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고, 은밀한 말도 확성기처럼 울려 퍼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무엇이든 다 하실 수가 있고, 계시지 않는 곳이 없기에 아무리 작은 무엇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고, 게다가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놓치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른다. 빛의 특징은 모든 존재와 상태를 분명하게 밝히고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외식이나 위선도 하나님 앞에선 다 드러나게 된다. 이를 알기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은 외식이나 위선으로 ‘쇼’를 할 수가 없고, 사사로운 말은 물론 악한 생각까지 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예가 요셉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집안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고 요셉과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요셉을 유혹했다. 그때 요셉이 이렇게 말하며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여기서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의 시선 차이가 드러난다. 보디발의 아내는 사람만 의식했고, 보는 사람이 없으니 동침하자고 했다. 이렇게 사람만 의식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외식과 위선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요셉은 하나님을 의식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다.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삶과 그렇지 않는 삶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 이렇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외식과 위선은 심각한 죄다. 그것은 곁에 사람을 두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누군가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하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생각해 보라! 심한 모멸감과 굴욕감을 느낄 것이다. 외식과 위선이 이와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투명인간 취급하듯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의 눈치만 살피게 되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외식과 위선을 행하게 된다. 이런 것을 ‘실제적’ 무신론이라고 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일상에서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냥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태도를 바꾸는 카멜레온과 같은 신자다. 소위 껍데기만 신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좋게 보실 리가 없다.
영적 디폴트 벨류
레26장은 예배의 책 레위기의 결론이다. 레26장은 11장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규례에 대한 결론으로 복과 화를 선포하고 있는데, 규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화를 당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레26장은 11장부터 제시한 여러 규례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우상숭배 금지, 안식일 준수, 성소공경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화를 결정짓는 시금석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오직 예수님, 주일성수, 교회중심이다. 이는 다시 둘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 중심과 예배중심이다. 주일은 예배의 날자와 시간의 문제이고, 교회는 예배의 장소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만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 그래서 주님으로만 충만한 삶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예배생활에 집중하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중요한 ‘영적 디폴트 벨류’(기본 값)다.
사업을 하는 어느 장로님의 공장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버렸다. 이 장로님은 불타는 공장을 가슴을 쥐어짜며 밤새 지켜보았다. 자신의 인생이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새벽예배 시간이 되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새벽에 드리는 찬양이 이런 내용이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여러분, 이 장로님이 이 찬양을 드렸을까요? 못 드렸을까요?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나는 그가 찬양을 드렸는지 못 드렸는지, 무슨 기도를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 기막힌 순간에도 예배시간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이 장로님의 영적 디폴트 벨류를 보여준다. 그의 영적 디폴트 벨류는 ‘주님이었고, 주님을 예배하는 예배’였다. 주님과 예배가 그의 인생의 기본 값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기막힌 순간에도 예배시간을 기억했고, 예배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2년 후에 회복하여 전보다 배나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기본 값이 주님이고 예배였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황망한 순간에도 예배에 성공할 수가 있었고, 이것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영적 디폴트 벨류다. 그것은 주님이시고, 또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주님께 드리는 예배다. 여기에 영적 기본 값을 두고 사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주님과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살기에 속이 빈 껍데기가 아닌 속이 찬 알곡 성도가 될 수밖에 없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CIhbPISeKUE 3679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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