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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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561회 작성일 23-06-25 14:34본문
최고의 버킷리스트
눅10:17~20
2023, 6/25. 11:00(성령강림 후 넷째주일)
버킷리스트(Bucket list)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 또는 죽기 전에 꼭해야 할 일들을 적은 목록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죽다’라는 뜻의 속어인 ‘Kick the Bucket’에서 왔는데,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을 집행할 때, 목에 밧줄을 건 다음 딛고 서 있던 양동이(Bucket)를 걷어찼던 관행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버킷리스트〉란 제목으로 상영된 영화도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상영된 이후 버킷리스트란 말이 유행되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노인이 한 병실에서 만났다. 한 노인이 대학시절 어느 교수가 작성해보라고 했던 버킷리스트를 생각하며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에겐 이제 부질없는 일이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다른 노인이 까짓것 지금이라도 해보자고 제안을 한다. 그들은 열심히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바치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병원을 탈출하여 스카이다이빙을 시작으로 하고 싶은 리스트 목록을 지워가며, 또는 새로운 항목을 첨가하며 버킷리스트를 실천한다는 내용이다. 수동적으로 침상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 가슴에 남는 감동적인 명대사가 있다. ‘당신은 인생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았는가?’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었는가?’ 살면서 늘 물어야 할 질문인 것 같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참 기쁨을 찾았는가? 여러분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있는가? 더 나아가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께 기쁨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버킷리스트를 쓴다면, 그 안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평상시에 해보지 못했던 것, 또는 자신의 삶에 있어 중요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하지 못했던 것이 포함될 것이다. 하여간 소소하지만 내 삶에 기쁨이 되는 것,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 성도로서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찾아 실천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주님의 버킷리스트
본문은 앞부분의 결론이다(길어서 본문만 읽었고, 설교는 전체를 다 다루겠다). 이는 우리 예수님의 버킷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지지난 주 말씀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행길이었다. 이 여행은 관광이 목적이 아닌 배척과 고난의 길이었고, 죽음을 향한 십자가의 길이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님은 그 시간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용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일을 이어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9:50), 예루살렘으로 향하는(9:51) 첫 번째 일이 70명의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전도자로 파송하신 것이다(1). 사실 영혼을 살리는 복음전도는 주님께서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실천해 오셨던 일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곧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셨다(4:32~38). 바로 이 소중한 일을 제자들에게 직접 실천해 보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버킷리스트였던 것이다.
갈지어다.
만약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무엇을 할 것 같은가? 물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망하며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생각하며 의연하게 그 시간을 보낸 사람도 있다. 우리 주님이 그랬다. 전도를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여기고 끝까지 이 일에 집중하셨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역시 전도를 그들의 버킷리스트로 삼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70명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는데, 보내신 곳은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이었다. 여기서 ‘친히 가시려는 동네와 지역’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지금 주님이 가시려는 장소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일로, 주님의 부활사건 이후에 복음이 선포될 곳이다. 후자에 복음전도가 (우리까지 포함하여)제자들의 사명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주님의 버킷리스트에 참여를 뜻하는 소중한 일이면서 우리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하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신, 소위 ‘파송훈시’(播送訓示)에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우선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주님은 전도를 ‘추수’에, 전도자를 ‘추수할 일꾼’에 비유하셨다(2). 추수는 끝을 생각하게 하는 단어다. 그것이 개인의 끝이든 역사의 끝이든 끝 날에 집중해야 할 것은 전도라는 것이다. 사실 전도는 끝을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전도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말씀하셨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 아무런 방어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양은 약함의 상징이다. 상상해 보라! 그런 양이 먹잇감으로 여기는 이리 가운데 있다. 양이 어찌 되겠는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이 전도자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전도자에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그 어떤 준비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4~11). 그러면 그냥 가서 죽으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복음전도에만 집중하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뜻이다. 세상이 전도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지만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사역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라는 말씀에 있다. 전도자를 보내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전도가 우리의 힘과 뜻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실제로 제자들은 전도현장에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했고, 기뻐하며 돌아와 주님께 이렇게 보고했다.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 전도자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세상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주님 이름만 가지고 나갔는데, ‘주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권능 있는 사역을 했고, 그 사역 속에서 주님께 위임받은 권능의 실체를 체험하였다. 그 결과에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사실을 인정하셨다.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 주님께서 이미 보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 현장에 계셨다는 뜻이다. 주님은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곳이 전도의 현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 주님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주님은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후 들떠 있는 그들에게 진짜 기뻐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능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의 문제다. 기록의 목적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인 것처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은 주님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사실 세상이 놀랄만한 권능을 행하면서 탁월하게 일을 하고, 눈부신 업적을 남겼어도 주님께서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헛수고 일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기도해야 것이 있다. ‘구원 받은 내 이름 기억하옵소서. 주가 나의 이름 보좌 앞에 놓인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하옵소서.’(찬483장). 산상보훈에서 주님은 주님께서 기억하시지도 못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꾸짖으며 내쫓으셨다(마7:22).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역자(전도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한 주님의 충고다. 주님이 기억하시는 삶, 주님이 기억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둬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본문이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복음전도가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전도에서 나타난 권능의 실체보다 전도를 통해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주님이 기억하시냐에 초점을 둬야하는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일이 ‘복음전도’라는 것이다.
최고의 버킷 리스트
버킷리스트는 먹고사는 생존을 위해 뒷전으로 밀어놓은 자신의 꿈을 의미한다. 버킷리스트를 실행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바램이 아닌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런데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드(Rend Girard)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지닌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여 내면화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를 ‘모방욕망’이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또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욕망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스스로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외부에서 충동된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우리는 무수한 타자의 조합이다. 그래서 나로서 살아가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또한 모방하게 된다. 그러니 자기를 상실한 모조품으로 사는 것이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 멋진 일지만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다운 삶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좇아 사는 것이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고 해서 ‘나’다운 삶은 아니다. 하나님 없는 버킷리스트는 아무리 신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안개같이 사라질 허무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가장 ‘나’다운 삶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을 좇아 사는 것이다. 나날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이고, 주님이 허락하신 하루하루를 꽃 봉우리처럼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니면 누가’라는 사명의식,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긴급성과 위기의식, 그리고 ‘전하지 않으면 내가 화를 당하리라’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주님의 소원인 복음전도에 열정을 쏟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에 기쁨이 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 성도로서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성도에게 최고의 버킷리스트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ejVBnx3A4us 4321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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