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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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503회 작성일 23-10-01 12:54본문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랴!
눅12:22~32
2023. 10/1. 11:00(성령강림 후 열여덟 번째 주일)
독장수 구구
옛날 어느 마을에 어수룩한 옹기장수가 살았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독을 팔았다. 그런데 이날은 독을 하나도 못 팔았다. 큰 마을로 가기 위해 고개를 넘다가 잠시 고갯마루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누웠다. 크고 작은 구름이 마치 독처럼 보였다. 그는 지고 온 독 세 개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독 두 개를 팔아 빌린 돈을 갚고, 남은 독으로는 독 두 개를 사야지.....’ 셈을 하면 할수록 점점 신이 났다. ‘독을 팔아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비단 옷을 지을까? 튼튼한 황소를 살까? 기와집을 지을까?’ 상상은 점점 커지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독을 팔아 황소를 사고, 황소가 서른 마리가 되고,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워야지!’ 너무 신이 났다. 김칫국을 잔뜩 마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큰 부자가 된 것처럼 기뻐하며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지게를 받쳐 놓았던 지게작대기를 치고 말았다. 독은 와장창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는 빈 지게를 지고 터덜터덜 고갯길을 내려왔다.
이는 경기도 양주지방에 전해내려 온「독장수 구구」라는 설화다. 실현성이 없는 허황된 계산은 도리어 손해만 가져온다는 교훈이다. 즉, 막연한 미래를 미리 셈하다 제발치도 못 봐 큰 낭패만 본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옛 설화에 나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도 근거 없는 자신감과 현실성이 없는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허황된 계산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며칠 전, 길을 가다가 개업한 작은 가게 앞에 놓여있는 화환의 글을 보고 혼자 웃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돈을 세다가 밤을 지세소서!’ 친구의 진심어린 덕담이라고 생각한다. 가게를 시작하는 사람 역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주변에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은 망해도 자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렵게 시작하는 일이니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과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독장수 구구’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자신감을 가지고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셈은 뒤로 하고 걷는 발길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걷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셈이라는 것은 걸은 뒤에 해야 비로소 틀림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염려의 대상이 아니라 맡김의 대상이다.
본문 역시 독장수 구구 설화와 비슷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다. 본문은 미래를 미리 비관적으로 셈하다가 염려에 갇혀서 불신앙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한 말씀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 빠져서 김칫국부터 마신 것도 문제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미리 겁을 먹고 염려하는 비관적인 태도도 문제다. 둘 다 생산적인 삶을 사는데 심각한 장애물이다. 본문은 후자를 경계한 말씀이다. 한치 앞도 모를 세상이고, 여기에 불확실성이 더해지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으로 인한 염려는 더욱 증폭된다. 그러다보니 당장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러한 일까지도 염려의 대상이 되고 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염려에 사로잡히면 믿음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
물론 삶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큼 절실하고 절박한 것도 없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 또한 이 사실을 잘 아셨다(30b).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미리 비관적으로 계산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이지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30a). 염려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까마귀도 기르시고(24),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입히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8).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까마귀나 들풀과 같은 미물도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신다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30b).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책임져주신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염려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를 떨치고 일어나려면 비관적인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고,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1~32).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주님은 본문에서 염려가 믿음이 적거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의 태도라는 것과 함께, 또한 염려의 특징에 대한 말씀하셨다.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26). 믿음이 적어 세상 사람처럼 염려하는 우리에 대한 따끔한 경고이면서 염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염려로는 아주 사소한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바로 앞 절 말씀이 그것이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5). 걱정이나 염려는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무익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키’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 ‘헬리키아’(ἡλικία)에는 사람의 ‘키’를 뜻하는 의미와 ‘생명’(time of life)의 의미가 있다. 우리 성경은 헬리키아를 ‘키’로 번역을 했는데, ‘생명’으로 번역한 것이 더 합당하다. 생명으로 번역하면,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는 본문의 의미는 ‘한 자의 길이에 해당되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가 된다. 즉, 잠시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염려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킨다. 잘 아는 대로 염려는 우리 인생을 갉아먹는 존재다. 그러니 염려는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무익한 것을 넘어 유해한 것이다. 염려를 뜻하는 영어단어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영어로 염려를 ‘worry’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물어뜯다’, ‘이빨로 목을 물어뜯어 질식시키다.’는 뜻에서 왔다. 염려에 물린 사람은 무력해진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사람은 염려로 인해 서서히 스스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염려가 깊어지면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영혼의 기능이 마비된다. 특히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지고 만다. 그러니 염려해서 될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염려할 시간에 무엇인가를 시도하라는 뜻이다. 걱정이나 염려 대신 생산적인 것을 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염려는 침묵의 살인자다. 우리의 영과 육을 교활하게 파괴하는 파괴자다. 이와 같은 염려를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려면 염려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던 사람을 어떻게 하면 더 정결하게, 더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 염려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던 사람이 성령에 목말라 헐떡이게 되고,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하여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도의 갈증, 말씀의 배고픔, 성령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이러한 신령한 염려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고, 말씀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라는 것, 염려할 시간에 찬양하고, 성령을 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염려꺼리가 달라진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염려의 대상이 바뀌게 된다. 본문에서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이 이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도는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는’사람이다. 기도는 염려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으로, 성도로 하여금 염려를 떨치고 가장 생산적이고 유익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형통한 삶의 열쇠다. 그래서 성경은 응답을 보장하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의 삶을 요청하고 있다. 대표적인 말씀 중에 하나가 이 말씀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구하는 것’이란 지금은 없지만 기도하면 주시겠다는 뜻이다. ‘찾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뜻이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지금 우리 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뚫어주시겠다는 뜻이다. 지금 없는 것 때문에, 잃어버린 것 때문에, 막혀 있는 답답한 현실과 상황 때문에 염려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약속은 없다. 그러니 염려대신 기도하라는 것이다. 걱정대신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면 영/육간에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주사기에 물이 들어가면 그 안의 공기가 밀려나듯, 기도하면 우리 안에서 염려하는 마음이 밀려난다. 그래서 일상의 염려가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무력하고 무익하고 유해했던 사람이 유력하고 유익하고 무해한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즉, 염려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바꾸게 된다.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이 말씀을 기억하며,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게 하는 염려의 사람대신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는 기도의 사람이 됩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7OM2FQravQc 324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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