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시는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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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9,932회 작성일 23-05-28 12:37본문
도우시는 성령님
롬8:26~27
2023, 5/28. 11:00
취급주의! 깨지기 쉬움
영혼의 화가, 혹은 태양의 화가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잘 아시리라. 그가 젊었을 때 광산에서 광부를 상대로 목회를 한 적이 있었다. 한 광부가 물건을 포장한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 입고 다녔다. 그 천에는 ‘취급주의 깨지기 쉬움’이란 글귀가 적혀있었는데, 그 글귀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러다보니 이 글귀 때문에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고흐는 달랐다. 그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글귀야말로 인간을 향한 가장 솔직한 진리이고, 인간의 실존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인간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그러니 조심해서 취급해야 한다. 겉으로는 힘이 있는 것 같고, 강한 것 같고, 용기가 있는 것 같아도 내면은 한없이 약한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고, 또한 작은 상처에 무너진다. 약간의 증기나 물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서로 서로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한다. 부부 사이도, 부모와 자식 사이도, 성도와 목회자 사이도, 성도와 성도 사이도 서로 취급주의를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귀한 말씀을 하였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1:24).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렇게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우릴 도우시는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 성경은 우리를 보호하여 돕는 분이라고 하여 ‘보혜사’(保惠師)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어성경은 돕는 자, 곧 ‘헬퍼’(Helper)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돕는 자는 성령님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도 돕는 자시고(구약에서 하나님이 돕는 자로 18회 나옴), 성자이신 예수님 또한 돕는 자시다. 그러니까 삼위 하나님이 곧 깨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를 돕는 자이신 셈이다. 그 중에서도 은혜의 시대에 성도와 함께, 주님의 몸인 교회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대표적인 별칭이 ‘도우시는’ 분이시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성령님께서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 째가 되는 날이다.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셨고,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을 포함하여 120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했다.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시작한 지 10일, 곧 주님께서 승천하신 지 10일 만에, 그러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 만에 그들이 모여 기도한 그곳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다. 이 사건을 기록한 곳이 사도행전 2장이다. 바로 오늘이다. 그래서 교회역사에서 오늘을 ‘성령강림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온 지 50일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날이라고 하여 ‘오순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바로 그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세계 모든 교회의 생일이기도 하다. 이런 뜻깊은 날에 성령님께서 우릴 어떻게 도우시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성령님은 우리 ‘안’(in)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with)계시고, 우리를 ‘위해’(for)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면서 특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a).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 결핍 덩어리다. 누군가, 무엇인가의 도움이 절실한 존재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완전하고, 온전하고, 충만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요, 또한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이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 온갖 죄악에 찌든 불결한 존재로 전락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가 범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약함’(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을 돕기 위하여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 예수님을 통해 그 구원을 실행하시고, 그 구원을 보존하고, 확장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역할을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이고, ‘돕다’는 단어가 그 핵심이다. 여기서 ‘돕다’는 헬라어로 ‘순안티람바노마이’(συναντιλαμβάνομαι)인데, 성경에서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이 용어는 세 단어 ‘순’(συν, 함께), ‘안티’(ἀντί, 대신하여), ‘람바노’(λαμβάνω, 짐을 지다, 가볍게 하다, 번쩍 들어 옮기다)의 합성어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도우심의 사건을 참으로 실감나게 표현해주고 있는 단어다(나는 개인적으로 성령님에 대한 용어로 요한이 사용한 ‘파라클레토스’보다 바울이 사용한 ‘순안티람바노마이’가 실감이 나고 좋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다정하게 계시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현실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절망적인 연약함과 무력함 속으로 성령님이 쑥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하시며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것,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짊을 대신 짊어져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이것이 ‘순안티람바노마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니체는 인간을 가리켜 ‘탄식하는 존재’라고 했다. ‘나는 출구도 모르고 입구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출구도 입구도 모른 채 서성이는 자일뿐이다. 현대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이런 현대성으로 인해 우리는 병이 들었다. 미심쩍은 평화, 비겁한 타협, 현대적인 긍정과 부정의 그 모든 도덕적인 불결함으로 인해 병들어 있는 것이다.’(1888년에 출판한「안티크리스트」첫 페이지에서). 이는 중세시대에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한 기독교 신앙을 떠나면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어버린 허무주의 상태에서 탄식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바울도 인간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 입구도 출구도 없는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성도는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고후5:8). 그 이유는 성도에게는 하늘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묶인 상황, 닫힌 환경에서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하늘이 열려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이 열리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소중한 기도까지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우리라는 것이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26b).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종교적 행위인 기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영적 활동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인간은 연약하여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능력과 지혜와 탁월한 아이디어가 없는 것보다 치명적인 심각성은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치명적인 실존적 상황을 바울이 아주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이다. 사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모르면서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본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한계성을 인식하고 탄식하는 바로 그곳에, 그 자리에, 오히려 참된 기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것은 우리의 유창한 언어도 아니고, 우리의 간절함도 아니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다. 즉,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연약함 가운데 있고, 기도한다고 해도 정과 욕심을 따라 잘못 구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먼저 안타깝게 기도하신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필요를 알게 하여 기도로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기도의 대로를 열어주신다. 기도만이 아니다. 말씀을 묵상하게 하고, 찬양하게 하고, 예배하게 하는 모든 영적 대로를 활짝 열어주신다. 주님을 섬기게 하는 모든 일에 영적 대로를 열어주신다.
영혼의 기쁜 손님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는 바울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생활의 출발에서부터 모든 과정이 성령님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작품이다. 그러니 성령님은 영혼의 기쁜 손님, 마음의 달콤한 손님이시다. 세상에 성령님보다 더 반가운 사랑의 손님은 없다. 인생의 유일한 답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생허무에 대한 답도, 연약한 인생에 대한 답도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인생의 텅빈 허무를 의미로 가득 채우시고, 눈물을 기쁨으로, 탄식을 찬양으로, 실패를 승리로 바꾸신다.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멸망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참 행복한 부자로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를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하고 자유롭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비롯한 성공적인 경건생활을 위한 영적 고속도로를 만들어주신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고마운 사역을 노래하는 찬양이 있다. 여러분과 함께 드리려고 하는 결단찬양,〈나의 등 뒤에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7nyTHEytmzc 538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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