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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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575회 작성일 23-04-30 15:17본문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1~6
2023, 4/30. 11:00
인생이라는 ‘잔’
전도서는 인간의 실존을 강물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7,8).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흐르지만 결코 바다를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인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족을 모르는 참으로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이다.
비가 오면 산과 들에 물이 넘쳐흐르게 된다. 그 물은 냇가로 흘러가고, 그 냇물은 다시 강으로 흘러가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그러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결코 바다가 가득 차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바다는 인생이라는 잔을 상징하고, 바다로 흘러가는 모든 강물은 일을 성취하기 위한 끝없는 인간의 수고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강물이 흘러가도 채워지지 않는 바다처럼 아무리 노력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란 잔이다. 인생은 끝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잔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수고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을 해도 그 잔이 채워지지 않는다. 즉, 만족이 없다는 뜻이다. 만족이 없으니까 인생이 힘들고 피곤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긴 하지만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부족함이 없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삶이 족하다고 고백한 이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고, 구약에서는 본문의 주인공 ‘다윗’이다.
다윗의 인생 시(詩)
시편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시를 선택하라면 많은 사람이 다윗이 지은 본 시편을 꼽는다. 나도 그렇다. 이 시는 다윗이 말년에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단 6절로 압축하여 고백한 것이다. 유대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이 시편을 암송하여 축복하고, 죽을 때도 이 시편을 읽어준다고 한다. 평생 아이의 인생에 하나님께 목자가 되어 달라는 의미이고, 또한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이르도록 해달라는 의미다. 유대인의 삶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한 것이 바로 이 시편이다. 천주교에서도 임종 때 이 시편을 읽어주며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영혼을 영원한 천국까지 안전하게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한다. F. B. 마이어는 이 시편을 사막의 오아시스, 험한 등산길에 있는 휴게소, 타는 듯한 한 낮의 시원한 동굴, 고요하고 신성한 묵상을 할 수 있는 정자, 곤비하고 쉼이 없는 인생에게 평안한 안식처와 같다고 했다.
다윗은 본 시편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온 것이다. 그는 실제로 어린 시절 목자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고백은 이와 같은 그의 생생한 삶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양떼를 위해 풀밭을 찾고, 물가로 인도하고, 불철주야(不撤晝夜) 양들의 안전을 생각하고, 맹수의 입에서 목숨을 걸고 양을 구해내는 경험을 통해 목자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힘없는 한 마리의 양에 자신을 비유하여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목자는 가장 비천한 직업군의 하나로 심지어 창녀와 동일한 도덕적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런 목자에 비유를 한 것은 신성모독이고, 이 비유는 매우 부적절하지 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무엇에다 비유한들 적절한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다윗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이 목자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텐데, 오히려 이를 숨기지 않는 것이 놀랍고, 지탄의 대상인 목자로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뿐이다. 예수님 또한 자신을 목자에 비유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가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상징과 같아 더욱 좋다. 아무튼 단 6절로 압축된 이 고백은 다윗의 인생 시이다. 특히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의 현재 상태인데, 세 개의 동사로 잘 보여주고 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이 동사가 모두 ‘완료형’이다. 이는 이미 부족함이 없고, 잔이 넘치고, 여호와의 집에 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상태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만족’이다. 지금 자신은 모든 것에 만족하다는 뜻이다.
누가를, 무엇을 인생의 목자로 삼고 사느냐!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이 힘들고 피곤하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아쉬울 것이 없는 만족한 인생, 매일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천국의 삶을 산다고 고백한 것일까? 그 비결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고백에 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거한 동사들의 시제가 모두 ‘미완료형’이다. 미완료형에는 진행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기에 자신은 아쉬울 것, 곧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잔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이 누구를, 무엇을 목자로 삼고 사느냐다. 대개의 사람들이 수고하지만 부족함을 채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쾌락을 목자로 삼고, 물질을 목자로 삼고, 권력을 목자로 삼고, 이념이나 사상을 목자로 삼고, 도울 힘도 없는 사람을 목자로 삼고,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사이비나 이단의 교주를 목자로 삼고 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들을 목자가 아니라 도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요10:10a). 그렇지만 다윗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은 결핍 속에서 자족할 줄 아는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 선한 목자는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요10:10b). 범위를 좁혀서 5절을 중심으로 이 점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5절은 눅15장에서 억지로 상속받을 유산을 요구하여 먼 나라로 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왔는데도 환대를 받은 둘째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분이 탕자의 이야기를 중동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더니 흥분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아들도,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못된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들 문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수치와 명예’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소위 ‘명예살인’이라는 제도가 있다. 가문이나 종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를 훼손한 사람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이 죽이는 제도다. 지금도 시행이 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탕자의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며 복음을 풀어 설명해주면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5절은 이런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아버지에게 억지로 유산을 요구해서 그것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이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반응을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 그런데 아버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다. 그는 하인들에게 큰 잔치를 준비하도록 명하였고, 아들을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 다음 옷과 신발과 반지를 끼워 잔치의 주인공 자리에 앉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리에 값비싼 기름을 붓고, 잔이 철철 넘치도록 포도주를 부어주었다. 잔치는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나 중요한 사람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 그리고 중동에서는 잔치에 초대된 중요한 사람에게는 값비싼 기름을 준비해서 그 머리에 부어준다. 또한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잔이 넘치도록 붓지 않는다. 만약 잔이 넘치도록 붓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의 표시다. 만약 주인이 잔이 비었는데도 채우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잔을 채우되 넘치도록 채우는 것은 주인이 손님을 여전히 환대하고 있다는 사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상을 차려주고,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잔이 철철 넘치도록 채워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다윗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또한 환대하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이고, 환대를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다윗은 이미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주님
지난주일 심리학자 칼 로저스 이야기를 했다. 심리적으로 건강과 만족을 위해선 ‘공감적 이해’와 ‘무조건적인 존중’이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처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해줄 때, 그래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줄 때, 치료가 일어나고 건강해진다. 따뜻한 사랑으로 섬김을 받을 때 회복이 된다. 또한 누구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존중을 받을 때다. 다윗은 베들레헴이란 작은 마을 출신으로 별볼 것 없는 이새라는 사람의 막내였고, 어린 목동이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수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으나 아쉬울 것이 없는 인생, 감사의 잔, 은혜의 잔, 축복의 잔이 넘치는 만족한 인생이 되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하나님께 존귀한 자로 존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를 부족함이 없는 만족의 삶으로 이끄시는 분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주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에서 주님은 모자란 포도주를 물로 만드신 이적을 베푸셨다. 특히 유대인이 결례를 위해 사용하는 돌 항아리 6개가 넘치도록, 그것도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래서 포도주가 모자라 망칠 뻔한 잔치를 끝까지 기쁨이 충만한 잔치로 만드셨다. 이 이적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는 분, 기쁨이 충만한 잔칫집처럼 우리 인생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요10장에서 주님께서 친히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처럼, 바울처럼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아쉬울 것이 없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로 결핍의식을 갖게 하는 불평의 영, 원망의 영, 결핍의 영, 불안의 영, 부정의 영을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제거해야 한다. 반면 만족의식을 갖게 하는 감사의 영, 기쁨의 영, 평안의 영, 자족의 영, 모든 상황을 좋게 선하게 아름답게 바라보는 긍정의 영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신 주님께서,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명보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 풍성한 생명, 풍성한 열매를 맺는 아쉬울 것이 없는 만족한 삶으로 인도하실 줄 확신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YCMGdS5YcN8 4774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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