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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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6,780회 작성일 22-05-21 22:09본문
리모델링, ‘조직’
행6:1~7
2022. 5/8. 11:00
보이지 않는 교회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보이는 교회보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보이는 교회건물은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또한 폐기될 수도 있고,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을 가면 기독교 왕국시대에 수 십, 혹은 수백 년에 걸쳐 건축된 교회가 성도가 없어 운영난에 시달리다가 다른 종교에 팔리기도 하고, 일반인에게 팔려서 유흥업소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광지의 매표소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흔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교회건물이 타종교에게 팔리는 경우도 있고,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보이는 건물로서 교회보다 보이지 않은 교회가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 못지않게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다. 특히 사도 요한의 경우,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1요4:20). 같은 선상에서, 보이는 교회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관심과 사랑을 쏟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관심과 사랑을 쏟을 수 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어느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둘 다 중요하다. 마치 육과 영,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것과 같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여 평가하지 않고, 같은 비중을 두고 있다. 지난주일 교회 리모델링을 강조하다보니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것도 보이는 문제와 관련이 깊다.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
신앙에 있어서 리모델링이 가장 적절하게 필요한 현장이 바로 ‘교회’다. 예배의 장소로서 건물도 그렇지만 공동체를 이끄는 조직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도 낡고, 여러 문제가 발생한 것처럼 사람의 모임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훌륭한 목적으로 모여도 세월이 지나면 본질과 목적이 퇴색이 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문제없는 사람이 없듯이 문제없는 교회도 없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약성경에 바울서신을 비롯한 여러 서신이 대부분 교회 이야기다. 우리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대로 문제없는 교회는 단 한 곳도 없다. 바울서신에서 대체적으로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칭찬을 많이 받긴 했으나 그 교회 역시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툼과 허영이 있었고(빌2:3), 지도자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4:2). 그 훌륭한 교회도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영어로 ‘Reformation’이라고 한다.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란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교회의 원형회복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원형은 무엇일까?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 교회’하면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를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교회의 원형인 초대교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교회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이 교회 역시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이다. 특히 문제의 해결책으로 교회조직을 리모델링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의 구성원은 같은 혈통이지만 성장배경이 다른 두 집단으로 되어있었다.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그것이다. 히브리파는 대대로 본토,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말하고, 헬라파는 멀리는 앗수르 제국 때부터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말한다. 초대교회의 영적 거인이었던 바나바를 비롯한 스데반, 바울, 디모데, 디도 등이 헬라파다.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이들은 혈통만 유대인이지 말이나 생활이나 습관이나 사상에서 본토 유대인과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이들이 오순절을 지키지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이들과 본토 유대인(히브리파)이 모여 교회를 이루게 되었는데, 최초의 기독교회인 예루살렘교회다.
예루살렘교회의 가장 큰 자랑은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된 대로 성도 상호간의 유무상통의 생활이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차별이 없고, 누구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그저 필요에 따라 나눠서 사용했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큰 유익을 주는 교회였다. 그런데 이 좋은 일에서 불평이 생겼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람 모인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부흥하여 성도가 많아진 것은 환영할 만하고 좋은 일인데, 문제도 그만큼 많이 생긴다. 초대교회가 그랬다. 말 그대로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베드로의 한 번 설교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한꺼번에 이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다보니 섬기는 손이 부족했고, 초대교회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나눔’에서불평이 생겼다. 한 마디로 나눔이 공평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1). 아무래도 사도들이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이다 보니 더욱 이런 원망을 듣게 된 것 같다. 5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탈로 교회 공동체에 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깊은 영적 통찰과 단호한 대처로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성격이 달랐다.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불만을 품고 일어난 일이었다. 교회가 시작하면서부터 두 집단으로 나눠질 위기였다.
사도들의 반응
사실 불평이나 원망이 별 것 아니지만, 그리고 일을 하다보면 불평과 원망을 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지만, 일하는 사람의 의욕을 꺾고, 공동체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 불평과 원망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게 된다. 곧 습관이 된다. 무엇이든 습관이 되고, 고정이 되면 인격이 된다.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신속하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들은 이 불평과 원망의 문제를 공동체 리모델링을 위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신속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것은 나눔을 전담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곧 ‘집사제도’의 시작이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3). 그리하여 최초의 집사 7명이 선출이 되었는데,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5, 모두가 헬라식 이름을 사용). 나눔 문제로 야기된 히브리파와 헬라파 사이의 갈등은 사도들의 발 빠른 대처와 7명 집사들의 노력으로 해결됐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는 일치와 나눔이라는 생태학적 이상을 멋들어지게 만들어갔다.
특히 불평과 원망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과 도전을 준다. 첫째는, 사도들이 이와 같은 원망을 상황의 변화를 위한 신호로 알고 민감하게 반응한 점이다. 하나님은 환경이나 사건(상황)을 통해 말씀을 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뜻을 발견하기도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변명을 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할 이 일에서 사도들은 변화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7집사를 선택하여 세웠다. 이렇게 사도들은 집사제도 설립을 통해 헬라파 유대인의 현실적 고민을 풀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 일을 원망했던 사람들까지 모두가 기뻐하였고,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7). 다음은, 문제해결을 위해 솔선해서 기득권을 내려놓은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눔을 전담할 집사를 7명 선출을 했는데,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이는 자칫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될 수가 있었다. 왜 히브리파 유대인은 한 사람도 없냐며 불만을 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모두가 기뻐했다(5a). 이는 사도들을 포함은 히브리파 유대인이 기득권을 내려놓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권한을 위임하고 본질에 충실한 점이다. 사람을 세워놓고 권한을 위임하지 않으면 리더십이 세워지지 않는다. 권한을 주어야 리더십이 세워지고 일이 제대로 된다. 사도들은 7집사에게 나눔의 일을 전폭적으로 맡기고 자신들은 거기서 완전히 손을 땠다. 완전히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4)에만 집중했다. 사도적 사명의 본질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
위기를 기회로
위기는 항상 기회를 동반한다. 잘 선용하면 엄청난 유익의 기회로 바뀌는 것이 위기다. 본문이 이에 대한 좋은 예다. 자칫 공동체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불평과 원망사건을 공동체 리모델링의 기회로 삼아 집사제도를 탄생시켰고, 이 일로 원망대신 온 무리가 기뻐하게 되었다. 이는 관계가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만 집중하게 되어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는데, 특히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까지 믿게 되었다.
물론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어떤 문제가 있어서 장로를 선택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척한지 17년이 되었고, 우리교회가 장로를 세울 수 있는 요건을 갖췄고, 자격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당회가 구성된 조직교회를 노회도 원하는 일이다. 나는 이 모두가 교회조직 리모델링에 대한 하나님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로를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믿음의 사람들과 동역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더욱 알차게 섬기기 위함이다. 기둥 없는 집은 쉽게 무너진다. 직분은 교회의 기둥이다. 장로는 말할 것도 없다. 기둥이란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란 뜻이지만 교회의 얼굴이란 뜻도 된다. 기둥과 같은 장로가 세워지면 교회도 든든하고, 교회의 위상이 크게 드러나게 된다. 나는 이번 교회조직의 리모델링, 곧 장로선택을 통해 초대교회에 임하였던 복이 우리교회에도 임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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