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부활의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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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2,549회 작성일 22-04-17 17:40본문
영광스러운 부활의 참여자
요19:38~42
2022. 4/17. 11:00(부활주일)
응원해주는 한 사람의 힘
하와이군도 북서쪽 끝에 ‘카우아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쥐라기 공원〉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섬은 한 때 지옥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다수의 주민이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정신질환자였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을 보고 배우며 자라고 있었다. 학자들은 카우아이 섬의 종단연구를 시작했다.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833명이 성인(30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을 추적하는 매우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많은 학자의 예상은 이러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인생에 잘 적응하지 못해 비행 청소년이 되거나 범죄자, 중독자의 삶을 살 것이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Emmy Werner)는 833명 중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201명을 따로 정해 그들의 성장과정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그들은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대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등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조사결과 이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기편이 되어 응원해주는 어른이 최소한 한 명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부모, 조부모, 삼촌, 이모 등... 실패하고 좌절해도 괜찮다고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한 사람이 있었기에 자신의 환경을 이기고, 낙심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속도는 느려도, 시행착오는 겪을지라도 오롯이 꿈을 향해 걸어가는 힘이 생긴다. 여러분에게도 자신을 믿어주고, 편이 되어주는 한 사람이 있는가? 꾸짖기보다 ‘그랬구나!’, ‘참 힘들었겠다!’ 하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가 있고, 또한 환경이 열악해도 다시 일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성도에게는 이런 분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도는 삶의 복원력이 강하고, 어려운 환경이나 힘든 상황에 대한 강한 돌파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함께 하신 주님께서 곁에서 힘이 되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공감하며 격려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온 수많은 인물의 삶이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다.
오늘이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 부활절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크고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항상’우리와 ‘함께’계시기 위해서다. 사실 육신의 몸이 부활하여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지 않고는 항상 함께 할 수가 없다. 육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이란 이런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사건이다. 모든 한계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부활신앙이란 모든 한계를 초월하여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경험하며 사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주님과 날마다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주님의 부활과 부활신앙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는 있어도, 주님과 항상 함께 할 수는 없다. 어떻게 2천 년 전 유대 땅에 계셨던 분과 함께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부활이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이 시간에는 주님의 부활과 함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 또한 이 사람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자가 되어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의 숨은 제자, 아리마대 요셉
진지하게 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성경에는 12제자만이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12제자 외에 성경에는 많은 제자들이 나온다. 여기에는 다수의 여성들이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따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숨은 제자’라고 부른다. 이런 숨은 제자 중에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부자였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정치/종교적으로 최종의결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 정회원 70명 중 한 사람으로 율법에 능통하고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말씀대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신실하게 기도하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 흔치 않는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데, 니고데모다. 둘 다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따랐다.
그가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마음에 두고 따른 지 오래지 않아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유월절을 맞아, 주님께서 백성의 요란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온 이후 일이 급하게 돌아가더니 마침내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것이다. 다른 제자들처럼 그도 일주일 만에 주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줄 몰랐다. 주님이 처형된 날 그는 갈등했다.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 매달린 대로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과 늘 함께하던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여자들 몇 명만 남았다. 공회원으로 총독 빌라도와 교분이 있었던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장례를 자청했다. 쉽게 이야기가 되어 허락을 받은 그는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향으로 씻고, 고급스런 천으로 주님의 시신을 싼 다음, 자신을 위해 마련해두었던 새 무덤에 안장했다. 여기까지가 성경에 나온 그의 이야기다. 성경은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동안 유대인이 두려워 나서서 주님을 따르지 못했던 그가 가장 곤란한 순간에 자신의 정체를 용감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을 그냥 글로만 읽으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 두 제자들은 대부분 숨어버린 상태였다. 이를 두고 그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나 상황이 그만큼 위급했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그 위급한 순간에 위험한 일을 자청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주님은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아서는 안 되는 가장 민감한 문제(유대인에게는 신성모독죄, 로마인에게는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 죄수였다. 주님은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정치범이었고, 로마 최고의 형벌로 처형당한 죄수였다. 이런 정치범의 시신을 거두어 수습하는 것은 반역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죄수의 시신은 가족에게까지 외면을 당했다. 게다가 유대인의 혐오와 증오로 말미암아 죽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이 일을 자청한 것이다. 이는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이 말씀을 그가 직접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요셉에 대한 뒷이야기
성경에는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가 끝이 나지만 기독교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가 되면서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5세기에 기록된 한 외경에 따르면, 그는 이 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회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로마감옥에서 40년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정황을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불이익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주님의 장례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삼일 후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주님의 이 말씀에 신경이 쓰였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무덤을 잘 지키도록 했으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제자들이 시신을 도둑질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 과정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주동자란 혐의를 받았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공회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40년의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아무튼 주님께 자신의 무덤을 내어주었다가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무덤과 같은 공간에 40년 동안이나 갇히게 된 것이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영광인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고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고 40년 감옥생활을 어떻게 보냈을까? 앞에서 말한 대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여 기독교 역사가 유럽 역사가 되다보니 믿음의 사람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혹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투옥된 그를 찾아오셨다고 하고, 새가 늘 날아들어 먹을 것을 물어다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작은 방에서 그는 오히려 영혼의 자유를 누렸다는 것이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가처럼 아무리 작은 공간도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곳이 곧 천국이고, 갇혀있어도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육신은 매여 있으나 영혼은 자유롭고, 세상적인 것은 잃었으나 영광스러운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부활의 주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한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저와 여러분도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부활은 영광이며 기독교 핵심이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장례를 치른 일로 자신이 가진 사회, 종교, 정치, 경제, 가문 등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40년을 보냈다. 그는 이렇게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얻은 것이 부활의 주님이다. 부활의 영광이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일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기뻐하고 그 안에서도 감사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의 본질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삶의 모습이다. 고난주간을 거쳐야 부활절이 온다. 고난을 통과해야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 믿는 일에는 고난이 전제되어 있다. 고난을 자청하며 헌신한 아리마대 요셉의 삶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또한 고난을 자청하여 희생을 감수하여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6qV5jEtrykg 1686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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