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이간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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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2,624회 작성일 22-04-10 13:46본문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이간하는 자’
잠6:16~19, 창3:1~5
2022. 4/10. 11:00
뮌하우젠 증후군(Munchausen syndrome)
‘뮌하우젠 증후군’이란 말을 아는가? 실제로는 앓고 있는 병이 없는데도 자신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일삼거나 자해를 하여 타인의 관심을 끌려는 정신질환을 뮌하우젠 증후군이라 한다. 이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 리처드 애셔(Richard Asher)가 「뮌하우젠 남작의 모함」이란 책에서 병명을 따왔다. 이들은 자신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아프게 보여서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환자 흉내를 내는 것이다. 의료계의 보고에 따르면 뮌하우젠 환자 대부분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았고, 지나친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서 홀로 서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택할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 뮌하우젠 증후군보다 더욱 무섭고 나쁜 것이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Munchausen syndrome by Proxy)이다. 이 증상은 아픈 대상을 자신이 아니라 자녀나 애완동물, 환자 등 주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선택한 대상을 고의로 아프게 만든 후, 옆에서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환자의 보호자에게 쏟아지는 동정의 시선을 즐기는 것이다.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의 피해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호킹 박사는 그의 간호사(일레인)와 재혼한 후 자주 손목이 부러지고, 칼에 베이고, 입술이 터지는 등 잦은 부상으로 병원을 찾았다. 그때마다 부인이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며 주위 사람의 동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호킹 박사를 집에서 심하게 학대한 후, 병원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 주위 사람의 동정을 받는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로 밝혀졌다.
이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은 최근에는 ‘사회적 뮌하우젠 증후군’(혹은 이간질 증후군)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2007년에 미국의 경영전문지〈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직장의 뮌하우젠을 조심하라는 기사를 실었다. ‘팀원 OO가 너와 일하기 싫어한다.’는 식으로 몰래 동료나 부하를 이간질하거나 갈등을 조장해놓고, 자신이 해결사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척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상사나 동료는 당연히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사실 이런 사람은 조직의 자원과 사기저하, 결속력 약화, 생산성 저하 및 조직을 천천히 죽게 만든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자기를 과시(신)하면서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쯤 이 증상으로 의심해볼 만하다고 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없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그렇지만 갈등과 문제를 일으켜놓고 해결자인 것처럼 행동하여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공동체에서 남을 해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사회적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를 조심해야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번째, ‘이간하는 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사단의 주요무기
이간(離間)이란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헐뜯어 관계가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관계를 비롯해서 국제관계에서까지 자주 사용되고, 특히 전쟁에서는 중요한 병법의 하나로 활용이 되고 있다. 소위 ‘이간계’(離間計)가 그것이다. 손자병법에서 상대를 가장 쉽고 크게 이기는 방법을 이간계라고 했다. 이간계란 같은 편끼리 싸우게 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계책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한 적과 상대하는 방법으로, 적을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계책이다. 이 계책은 상대방이 빈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할 때, 아군에겐 아무 피해도 없이 적에게 극심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기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략가들은 이 방법을 즐겨 써왔다. 중국의 고전 「삼국지」를 보면, 이간계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 혼수모어(混水摸魚), 차도살인(借刀殺人) 등이 있다.
사실 이 이간질은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주요무기다. 사단은 원래 거짓말쟁이에다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막 깊숙이 들어가 평생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는 수도사가 있었다. 마귀들이 큰 상금을 걸고 이 수도사를 유혹해서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래서 여러 마귀가 도전을 했다. 먼저 시련마귀가 도전하여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수도사에게 주었다. 그런데 수도사는 고통과 시련에 굴복하기는커녕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다음으로 음란마귀가 도전하여 매력적인 여인으로 둔갑해서 수도사를 유혹했다. 수도사는 여인에게 눈길도 안 주었다. 이번에는 탐식마귀가 도전을 했다. 기도와 묵상 중인 수도사 앞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각종 맛난 음식을 차여놓고 유혹했다. 이 역시 수도사는 침도 삼키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만 열중했다. 모두가 이렇게 실패하자 경험이 많은 늙은 마귀가 자기가 한 번 유혹해 보겠다고 나섰다. 잠시 주변을 산보하고 있는 수도사에게 늙은 마귀가 다가가 수도사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수도가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수도의 자리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급히 돌아갔다. 늙은 마귀가 성공한 것이다. 도대체 비결이 무엇이냐고 마귀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늙은 마귀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신은 수도사에게 단지 그의 동생이 오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가 되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렇게 화를 내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간 것이라.’ 그동안 사막에까지 들어와서 기도와 묵상을 해도 떨쳐내지 못한 동생과의 경쟁의식, 그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질투심을 이용하여 늙은 마귀가 이간질을 한 것이다. 이 이간질에 수도사의 질투심이 폭발하여 마귀의 유혹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간질의 최초 희생양, 하와
그런데 이 이간계의 원조가 성경에 나온다. 그는 당연히 사단이다. 처음 사람 하와가 하나님의 최초 계명이자 유일한 계명을 범하고 타락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사단의 이간질 때문이다. 뱀으로 둔갑하여 하와에게 접근한 사단은 하와에게 말했다. 우선, 사단은 하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다(창3:4).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또한,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은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 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창3:5).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졸지에 하나님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인간 위에 굴림하며 인간을 조정이나 하려는 비열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전형적인 사단의 이간질이었다. 바로 이 사단의 이간질에 하와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하와는 이간질의 최초 희생양이 된 것이고, 이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인류가 불행의 수레바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사단의 이간질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간질을 극복하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단의 이간질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을까? 앞에서 소개한 하와와 사막의 수도사 사건을 되짚어보면 그 답이 나온다. 첫 번째는 ‘철저한’ 신뢰다. 하와가 사단의 이간질에 쉽게 무너진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철저하지 못한데 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틈을 보인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사단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보려고 하와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와가 그의 말에 걸려들도록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질문을 한 것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시하는 것이지만, 이런 얼토당토 않는 질문에 하와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꾸를 한 것인데, 여기서 그만 틈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말한 것이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사단이 틈을 본 것이고, 그 틈으로 하와를 집중 공격하여 무너뜨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와가 사단의 이간질에 무너진 이유다. 반면에 주님을 보라!(마4:1~10). 신뢰가 깊으면 누구도 넘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경쟁의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경쟁의식에서 시기와 질투를 비롯한 마귀적인 것이 나온다. 마귀는 헬라어로 ‘디아볼로스’(διαβολοϛ)인데, 상경에 123회 나온다. ‘비방자’, ‘참소자’, ‘중상자’, ‘모함자’, ‘이간질하는 자’, ‘시험하는 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분쟁을 일으키는 자’라는 뜻도 있다. 이름의 뜻에서 보듯 마귀, 곧 사단은 온갖 나쁜 짓, 악한 짓을 일삼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모습이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마귀의 수하로 사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마귀가 이간질에 자주 사용하는 것이 수도사 이야기에서처럼 ‘경쟁의식’이다. 즉, 경쟁의식을 통한 질투심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쟁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수도사 이야기다. 평생 사막에서 기도와 묵상을 했어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이 경쟁의식이었다. 시기와 질투였다. 그렇지만 이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사랑’이다. 사랑은 경쟁의식을 극복하고 질투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여러분은 사랑의 이미지를 사물로 표현한다면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나는 산과 바다에 비유하고 싶다. 산과 바다의 특성은 ‘포용력’과 ‘수용성’에 있다. 누구의 말처럼 가리지 않고 세상 모든 흙을 받아줘서 ‘태산’(泰山)이 되고, 가리지 않고 세상 모든 물을 받아줘서 ‘대양’(大洋)이 된 것이다. 사랑이 이와 같다.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가르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다 품어주고 받아준다. 대상에 대해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말하고, 좋게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 대신 좋지 않는 부정적인 것은 보고 들어도 다 수용하고 포용하여 덮어버린다. 눈이 멀어서 그렇다. 생각해 보라! 이런 사랑 앞에 허영과 다툼, 질투를 유발시키는 경쟁의식이 어떻게 자리할 수 있겠는가? 잠언의 말씀이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철저한 신뢰와 산처럼 바다처럼 포용하고 수용하는 크고 넓은 사랑만이 사단의 이간질을 극복할 수 있다. 형제를 이간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나 형제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사랑하시고 좋아하신다. 우리 모두 사단의 이간질이 통하지 않는 멋진 관계,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yjzd-hBFN2k 16645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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