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망령된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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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627회 작성일 22-04-03 14:26본문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망령된 증인’
잠6:16~19, 출20:16
2022. 4/3. 11:00
지혜로운 재판 Vs 악한 재판
성경에 지혜로운 재판사건이 나온다. 소위 ‘두 창녀의 아들사건’(왕상3:16~28)이 그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으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고(왕상3:12), 곧바로 있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에게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두 창녀가 며칠 사이로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결에 아이를 깔아뭉개 죽이고 죽은 아이와 산 아이를 바꿔치기를 하여 산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증인도 물증도 없었다. 두 사람의 주장만으로 판단해야하는 난감한 사건이었다. 이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솔로몬의 지혜가 발휘되어 멋지게 해결되었다. 판결내용은 이렇다. ‘증인도 물증도 없는데 산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 주장하니 산 아이를 둘로 쪼개서 각자 공평하게 갖도록 하라.’ 판결내용만 보면, 과격하고 잔인하지만 여기에는 고도의 심리전략이 있다. 즉, 모종의 경쟁의식과 비교의식, 또는 시기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였고, 모성애를 가진 사람 역시 이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나타났다. 경쟁의식과 비교의식, 또는 시기심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있는 것은 자기도 있어야 하고, 내가 못 가진 것을 남이 가지는 꼴을 못 본다. 내가 없으면 차라리 남도 못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진짜 산 아이의 엄마가 아닌 여자는 아기를 칼로 나누라고 할 때, 그렇게 하자고 했다. 반면 진짜 아이의 엄마는 자기가 아기를 갖지 않아도 좋으니 살려만 달라고 애걸했다. 그야말로 경쟁의식과 모성애가 폭발한 것이다. 이로써 누가 진짜 산 아이의 엄마인지가 분명하게 가려지게 되었다.
성경에는 이처럼 지혜로운 재판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되찾은 좋은 사례만 있지 않다. 오히려 재판이 오염이 되어 나쁜 재판, 악한 재판, 억울한 재판의 사례가 더 많다. 이것은 결국 인간사회가 그렇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악한 재판의 대표적인 사례로 구약에서는 ‘나봇의 재판’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재판’을 꼽을 수 있다. 나봇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려다 목숨과 땅까지 빼앗긴 사람이다.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악한 왕 아합의 별궁 곁에 그의 포도원이 있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을 자기가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거나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나봇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나 팔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합은 크게 낙심했고, 그의 아내이자 성경에 나온 대표적인 악녀인 이세벨 왕후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였다. 재판을 열고, 나봇을 피의자로 부른 다음, 거짓증인에게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했다. 그래서 나봇은 신성모독 죄로 즉결 투석형을 받고,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죽었다. 그리고 그의 포도원은 아합이 차지했다. 거짓증인을 내세워 나봇과 그의 가문을 파멸로 내몬 아주 사악한 재판의 사례다. 신약에서 예수님 역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에게 매수된 증인의 거짓증언으로 십자가형을 받아죽으셨다. 예수님의 죄목도 ‘신성모독’이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이 되었고,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 매우 엄중하게 보았고, 때문에 십계명에서까지 재판을 굽게 하는 거짓증거를 못하도록 명문화한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여섯 번째, ‘거짓을 꾀하는 망령된 증인’에 대한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방망이, 칼, 뾰족한 화살
잠언에 거짓증인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나온다,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잠25:18). 방망이와 칼과 뾰족한 화살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모두 당시는 위협적인 ‘전쟁무기’였다. 방망이(מֵפִ֛יץ)는 ‘부숴뜨리다.’, ‘파괴하다.’, ‘흩다.’는 의미의 ‘푸츠’(פּוּץ)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대상을 산산이 파괴시키고 무너뜨릴 만큼 거대한 망치(철퇴)’를 뜻한다. 사극 등에서 자주 나오는 성벽을 쳐서 무너뜨리거나 성문을 부수는 공성퇴와 같은 무기다. 칼은 베거나 찔러 살상하는 대표적인 무기이고, 뾰족한 화살은 멀리 있는 적까지 죽이는 무기다(한자로 ‘煞’은 무교에서 말하는 저주, 고기를 잡는 작살, 전쟁에서 사용되는 화살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참으로 취급에 주의해야 할 무기들이다. 이와 같이 심각한 존재가 거짓증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증인의 거짓증언은 혀로 행하는 살인행위다.
아무튼 거짓증인은 재판을 그르치게 하고, 그로인하여 정당한 사람이 재산이나 명예, 생명, 신체상으로나 시간상으로 큰 손해를 겪게 하며, 오히려 부당한 사람이 계속 죄를 범하게 버려두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다. 나봇의 재판과 예수님의 재판이 이를 확인해 준다. 어떤 연유로 증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들의 거짓된 말 한 마디가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생각한 경건한 나봇과 그의 가족을 비참하게 파멸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이신 주님을 신성모독자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처형을 당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거짓증인은 불의한 자들이 득의한 세상을 만든데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불의의 가담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증인의 증거가 거짓으로 판명이 나면 거짓증인은 피고인에게 꾀한 대로 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신19:15~21).
본문의 정신
본문이나 십계명 제9계명은 일차적으로 법정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법정에서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목적으로 거짓증거를 하는 문제다. 법정에서 증인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과학적인 수사가 어려웠던 고대사회에서 증인의 증언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 재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거짓증언하면 재판에만 한정이 되어 우리의 삶과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가 있다. 대부분은 살면서 재판에서 증인으로 증언하는 일이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본문의 정신을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십계명 제9계명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이웃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이 난무한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안전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공동체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본질적인 영역이라면 거짓은 필연적으로 정의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가로막는 가장 일반적이고 무서운 죄악이다.
그러므로 본문이나 제9계명은 우리에게 모든 형태의 거짓된 말을 제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부정직한’ 말이다. 거짓말, 거짓소문, 악한 마음으로 중상 모략하는 것 등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전체를 통해 이와 같은 부정직한 말들은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이다. 부모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은 그 죄악의 중요성을 곧장 인정하지만, 거짓말은 죄의 무게를 작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거짓말은 종종 죄의식 없이 하고 지내는 상황을 도출하기도 합니다. 거짓소문도 마찬가지다. 별 죄의식 없이 거짓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 요즘 개인방송이 용이해지고, 사회관계망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덩달아 가짜뉴스(거짓소문)가 판을 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신자까지 포함되어 가짜뉴스를 만들고, 또한 퍼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혹은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중상모략도 활개를 치고 있다. 사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망령된 증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아무튼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며, 공동체의 안녕과 공동체의 정의를 구현해 가는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방망이(철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다.
마귀의 언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언어를 사용하자.
거짓말, 거짓소문, 가짜뉴스, 중상모략과 같은 말에 매달리는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치유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를 부탁드린다. 첫째, 내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쁜 생각이 들고 비난하며 욕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내가 나쁜 놈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을 인정하며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내가 영적으로 많이 성숙해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망령된 증인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즉, 마귀의 언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둘째, 기도하면서 주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 살림의 언어, 회복의 언어, 치유의 언어를 허락해 주소서. 저에게 사랑의 언어를 가르쳐주소서. 믿음의 언어,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언어를 주소서. 그리하여 마귀의 언어로 남을 해하지 않게 하소서.’ 살면서 우리는 수시로 많은 결심을 한다. 하지만 결심대로 이뤄지는 것은 거의 없다.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8:44)인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이기적이고 허영심에 들뜬 존재다. 항상 시기와 질투와 열등감에 빠져있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로 끊임없이 거짓말, 거짓소문, 중상모략을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마귀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우리의 결심을 현실이 되게 하는 방법은 기도다. 사실 기도는 성도의 비밀병기다. 기도로 마귀의 진지를 흔들어 무너뜨리고, 기도로 마귀를 결박하여 추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에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했어도 싸이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 하늘길이 항상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 주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의 사람이 될 것이다. 모쪼록 주님의 귀한 언어를 내 것으로 삼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셋째,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재판에서 증인이 되거나 복음의 증인이 되거나 자신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바를 진실하게 말할 수 있는 증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영어로 순교자를 ‘martyr’라고 한다. 이는 헬라어로 증인을 뜻하는 ‘마르튀스’(μάρτυς)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 역시 증인의 삶이 얼마나 엄중한 지를 잘 보여준다. 망령된 거짓증인이 살상무기와 같다면 진실한 참된 증인은 순교자와 같다. 적어도 모든 성도는 재판에서 증인은 아니라도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한 참된 증인이 되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하는 결단이 요구된다. 아무튼 거짓을 꾀하는 망령된 증인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복음의 참된 증인이 되자. 절망적인 죄인을 영광스러운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처럼 한 가정을 바꾸고, 한 사회, 국가,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참된 증인이야말로 공동체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비결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한 증인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UOLyUTmczQ8 1493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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