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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악한데 빠른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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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1,449회 작성일 22-03-2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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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악한데 빠른 발

6:16~19

2022. 3/27. 11:00

충동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발끈 폭발해 성질을 내는 자신의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해 폭언을 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사람은 보았는가? 이와 같이 순간의 끓어오르는 충동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는 것을 충동조절장애혹은 충동조절장애 전조증상이라고 한다. 충동조절장애(衝動調節障礙)란 자신 혹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그 충동을 참지 못하고 반복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심리학적 용어다.

 

충동조절장애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병적(病的)으로 무엇에 몰두하는 것과 같이 본능적 욕구가 지나치게 강하거나 자기방어 기능이 약해져서 스스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정신장애를 말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제어가 안 되고,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 예는 다양하다. 단순히 분노뿐만 아니라 병적 도박, 병적 도벽, 방화벽, 발모, 간헐적 폭발성 장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무튼 현대사회에 들어와 이런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스마트폰 중독, 인터넷 중독, 마약중독, 알콜중독, 도박중독, 쇼핑중독과 같은 각종 중독현상도 충동조절장애의 원인이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쉽게 죄의 도구로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충분히 기도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Sole’(발바닥)‘Soul’(영혼)

발이라고 하는 것을 따지고 보면 신비로운 부분이 있다. 발바닥을 영어로 ‘Sole’이고 한다. 영혼이란 단어도 ‘Soul’이다. 이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발관리 요법에서는 발바닥을 내적 영혼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며, 발관리의 중요성을 강조다. 발관리가 곧 영혼관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발바닥을 뜻하는 단어 ‘Sole’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철자를 바꾸면 ‘Lose’가 된다. 이는 발바닥이 정상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이다. 발이 정상에서 벗어나면 즉, 발이 잘못되면 육체적인 건강도 영혼도 잃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을 잘 관리해서 발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영혼도, 건강도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영적으로도 퍽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이란 단순히 신체의 부위를 넘어 손과 함께 행위의 주체다. 이런 점에서 발관리가 곧 영혼관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지만 우리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하면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발이 정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잘 관리는 것은 육체적 건강은 물론 영혼의 건강도 보장 받는 비결이다. 그래서 성경은 발관리를 강조한 것이다.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하게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4:26,27). 아울러 발을 잘 관리하는 것이 복 있는 자의 태도라고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 앉지 아니하고’(1:1).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다섯 번째,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도 발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앞에서 발한 대로 발은 행위의 주체다. 빨리 달려간다는 것은 빠른 실행()을 뜻한다. 그러니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이란 악한 일을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태도를 말한다. 마치 충동조절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악하고 나쁜 일에 충동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는 태도를 가진 것이다. 발관리에 실패한 전형인 셈이다. 이것이 악인의 특징이다.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1:16). 아무튼 자신의 발관리에 실패하여 악하고 나쁜 일에 충동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또한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의 묵상 글에 나온 이야기다. 저녁에   청소를 마무리하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심한 갈증이 생겼다. 다시 일어나기가 너무 귀찮아서, 옆을 지나고 있는 큰 아이를 불렀다. ‘! 이리와 ! 시원한 물 한 잔 가져와...’ 몇 초 , ‘! 이리와 ! 아빠한테 시원한 물   갖다드려!’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는 동생에게 큰 아이가 하는 말이었다. 큰 아이가  몇 초 만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이를 보며, 죄에 물든 인간은 선하고 좋은 것을 향해서는 빨리 달리지 않지만 악하고 나쁜 것을 향해서는 너무 빨리 달려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적용이 다소 과격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이고, 비극인 것은 분명하다. 선한 행위는 각종 복과 상급을 제시하며 격려해도 잘 따르지 않지만 악한 행위는 온갖 저주와 심판으로 경고해도 경쟁하듯 쫓아가는 것이 인간이다(28).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불을 보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를 보면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발을 속히 돌이키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발

반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발이 있다. 우선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발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곧 회개다. 아무리 극악한 자라도 회개하면 받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구약에서는 므낫세이고(대하33:12,13), 신약에서는 탕자의 이야기(15). 탕자는 생존한 부모에게 미리 상속을 받아 그 소중한 유산을 허랑방탕한 생활로 다 탕진해버렸다. 요즘도 이 이야기를 중동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치를 떤다고 한다. 이런 자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길이 막막한 그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버지가 돌아온 그의 발을 크게 환영하며 맞아주었다.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악한 길에 돌이키는 발을 기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돌이키는 발과 함께 돌이키게 하는 발, 곧 돌아오게 하는 발을 기뻐하신다. 돌아오게 하는 발을 다른 말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다. 15장에 따르면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는 발이다(4,8). 바울은 이런 발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0:15). 잃어버린 자를 찾기까지 찾아다니는 발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복을 약속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12:3).

 

세 번째돌아와서 감사하는 발이다. 주님께서 한 마을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열 명의 나환자가 서서 주님께 고쳐달라고 부르짖었다. 주님은 그들의 요청에 즉시 응답하여 그들을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들이 깨끗해졌음을 확인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정도 지난 다음 그 열 명 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서 치료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그때 주님께서 열 명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감사할 줄 모로는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감사하기 위해 다시 찾아온 사마리아인을 주목하시며,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육체적인 질병치유와 함께 영혼의 구원까지 허락하셨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와서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을 한 그를 주님은 기뻐하시며 축복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와 감사한 사람이 겨우 한 명이었던 것이다. 감사가 습관이 되고, 감사에 빠른 발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집, 곧 예배의 자리로 향하는 발이다. 오랫동안 도망자의 삶을 달았던 다윗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여기서 여호와의 집에 산다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뜻한다. 늘 주님과의 교제를 사모하고 사랑하여 교제의 자리로 달려가는 가는 것을 뜻한다.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그토록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사는 것, 곧 주님과의 교제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이 그의 삶에 가장 안전지대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27:5). 그래서 그의 발은 항상 하나님의 집으로 향했다. 늘 예배의 자리로 향했다. 주님께 예배하기 위해,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향하는 발, 예배의 자리를 향하여 달라가는 발이다. 평생 다윗이 꿈꾸던 발이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빨리 달려가는 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발, 주님과 교제의 자리로 달려가는 발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발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우리의 믿음을 측정하는, 하나님의 저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를 겪고 있는 지금나의 믿음의 무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예배생활이 일정하지 못한 사이 세상의 길로 빨리 달려가는 발이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발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모쪼록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아름다운 발, 돌아와 감사하는 발,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빨리 달려가는 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발, 주님과 교제의 자리로 달려가는 발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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