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악한 마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1,565회 작성일 22-03-20 13:55본문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악한 마음’
잠6:16~19, 마12:43~45
2022. 3/20. 11:00
마음이 중요하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예배 중에 한 아이가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화약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용한 예배 중이라 그 소리가 매우 컸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하나님을 찾았다. 예배 후, 당황한 부모가 아이를 심하게 야단치자 목사님이 다가와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이 아이는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했습니다.’ 부모가 어리둥절하며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제가 오늘 설교에서 종말과 최후심판에 대해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 누구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총소리 한 방으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다시 찾기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이성보다 감성, 머리보다 가슴이 발달한 목사님인 것 같다. 목사님은 유머를 통해 두 가지의 성과를 거뒀다. 첫째는 부모에게 크게 혼이 날 아이를 구한 것이고, 둘째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도를 부드럽게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도 불행해진 사람이 없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어떤 마음의 태도로 사람이나 사건,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고 한다. 마음은 감정과 생각과 이성의 중심이다. 우리 삶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살아 있어야 하고, 마음이 건강해야 하고,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마음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무엇보다 마음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본문은 이 마음에 대한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을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곧 싫어하시는 ‘악한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마음을 얻어야 살 수 있다.
기업의 관심은 이윤창출이다. 그리고 그 이윤창출의 핵심은 인적관리다. 그 동안 기업들은 어떻게 사람을 관리해서 최대의 생산성을 얻을 수 있을까,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따를 것이라며 직원을 독려했고,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보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넘어서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보상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기업들은 직원의 후생과 복지에 관심을 쏟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로 직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제품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기술과 품질을 강조하는 기술경영, 품질경영을 강조했고, 사람들의 선택기준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이나 품질은 기본이고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감동경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감동을 주어야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소중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형편을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라는 것이다.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보아야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다. 전에는 ‘나 박사야!’ 하면 사람들이 따라갔다. 전문가나 권위자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밥 산다!’고 하면 그리로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에게 사람이 모인다는 뜻이다. 즉, ‘박사 위에 밥사 시대’가 된 것이다.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쳐야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앙생활도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형통하다. 다윗이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날마다 잘 된 이유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마음에 합한 자란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주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사람일까?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선한’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마음은 비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동양 성현들이 오래전부터 이야기했던 주제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선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있다. ‘교육’이다. 인간은 본래 악하지만 좋은 환경에서 잘 가르치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하지만 가르치지도 않고 나쁜 환경에 방치하면 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환경에서 기회있는 대로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진영이 강조하는 결론이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환경과 교육만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좋은 환경과 훌륭한 교육을 통해 선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요즘처럼 좋은 환경에서 질 높은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때가 없었다. 그런데도 악은 창궐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악한 사람이 득실거리고 있다.
이에 대한 연장으로 요즘은 ‘마음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마음속에 쌓여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깨끗이 비워내고(虛心),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下心). 이는 거의 유행어가 되어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곧잘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의 변화는 환경이나 교육에 있지 않고, 마음의 변화 또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소제가 되고 비워진 것이 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비어있으면 오히려 위험하다.
요즘 시골가면 빈 집이나 농사를 짓지 않는 밭을 흔히 볼 수가 있다. 허물어질 것 같은 집도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괜찮은데, 멀쩡한 집도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두면 금방 벽에 금이 가고, 마당은 물론 방과 지붕까지 잡초가 무성해 진다. 간혹 끔찍한 범죄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밭도 곡식을 심지 않고 그대로 비워두면 온갖 잡초가 우거져 금방 묵정밭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은 깨끗하게 소제가 되었으나 비워두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한 집에 귀신이 살면서 집이 엉망이 되었다. 귀신도 살 수 없을 만큼 집이 심하게 망가졌다. 귀신이 그 집을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갈 곳이 없자 전에 나왔던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찾아왔다. 그런데 집이 깨끗이 소제가 되어 있었다. 귀신도 양심이란 것이 있었던지 그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자기처럼 집이 없어 떠돌아다닌 귀신 일곱을 불러와 함께 그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의 형편이 전보다 훨씬 나빠졌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비유를 ‘빈 집의 위기’라고 한다. 여기서 집은 ‘우리 마음’이다.
사실 이 말씀을 보면 소제만 하고 비워둔 ‘빈 집의 위기’에 대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집이 망가진 것은 집이 비어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처음부터 귀신이 살았기 때문이다. 수리하고 소제한 집에 이제는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살았기 때문에 형편이 전보다 더 나빠진 것이다. 처음부터 좋은 주인, 착한 주인, 선한 주인이 살았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악한 주인, 나쁜 주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스스로도 감탄하셨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망가뜨린 것이 사단이고, 귀신은 사단의 졸개다. 바로 이 사단의 졸개 귀신이 집 주인으로 있으니 그 집이 온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가 주인이냐?
몇 년 전에 은퇴를 앞두고 있는 목사님이 시무한 교회를 방문했다. 목사님도 나이가 많고, 시골이라 성도들 역시 나이 많은 분들만 있어서 그런지 교회가 엉망이었다. 화단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교회마당은 나뭇잎이 뒹굴고, 예배당은 냄새가 나고, 화장실은 문을 열어놓고 사용해야 할 정도로 역한 냄새가 났다. 칡넝쿨이 교회담장을 넘어와 사택과 교육관 벽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사임하고, 나와 친한 목사님이 그 교회를 부임하였고, 몇 개월이 지나, 아마 이맘때 쯤 되었을 것이다. 고로쇠물이 있으니 함께 마시자고 초대해서 갔다. 갔더니 교회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교회마당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고, 화단은 잘 정리되어 다양한 화초와 나무가 심겨져있었고, 예배당이나 화장실도 윤이 날 정도로 깨끗했다. 교회담장을 뒤덮고 있던 칡넝쿨도 다 정리가 되고, 교회 뒤편까지 깨끗했다. 목사님이 바뀌니까 교회가 완전히 바뀌었다.
누가 주인이냐가 중요하다. 같은 집도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관리가 달라진다. 인테리어를 비롯하여 가구, 벽지, 장판, 조명, 소파, 식탁, 가구의 배치 등. 심지어는 집의 구조와 용도까지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같은 나무도 관리하는 주인에 따라 멋진 작품이 되기도 하고, 그냥 잡목이 되기도 한다. 같은 밭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수확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삶도, 마음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주인, 마음의 주인이 누구냐에 달렸다. 인생의 주인이 바뀌어야 삶이 바뀌고,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야 마음이 바뀐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주인을 바꾸는 일이다. 베드로 사도의 말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벧전3:15a). 예수님을 주로 삼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거룩하게 된다.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셔야 한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 사람은 소망이 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축복이 있다. 빛이신 주님이 주인이셔야 어둠의 일을 벗고 빛 가운데 거하면서 빛 된 삶을 살게 되고, 진리이신 주님이 주인이셔야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주님이 주인이셔야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신 주님이 주인이셔야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게 된다. 주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확장시키고 키워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fkOacEUK67c 15413회 연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