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교만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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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1,967회 작성일 22-02-20 13:58본문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교만한 눈’
잠6:16~19
2022. 2/20. 11:00
덕분에, 덕택에
지난주일 주보 글에서,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평생 아버지의 등을 그리워했던 한 남자를 소개했다. 그런 그가 마흔 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많은 것이 변했다. 그중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무인도에 꼭 하나만 가지고 간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거야?’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음. 자기는 안 되겠다. 무인도에 가면 너무 고생하잖아. 내가 좋자고 자기를 고생시킬 순 없잖아!’ 약간 당황한 아내는 무인도에 가도 고생은 하지 않고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귀여운 억지를 부렸다.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야겠지?’ 그러자 아내가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날, 그의 아내는 온종일 그가 한 말 때문에 행복했다. 그들은 연애기간에도, 결혼한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그는 그 이유를 모두 ‘아내덕분’이라 하고, 그의 아내 역시 모두 ‘남편덕분’이라 했다.
화목하고 행복한 부부는 항상 남편은 아내덕분이라고 말하고, 아내는 남편덕택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화목하지 못하고 불행한 부부는 항상 남편은 아내 탓만 하고, 아내 역시 남편 탓만 한다. 탓만 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상대방의 약점에 주목을 한다. 그렇지만 덕분이라고 덕택이라고 말한 사람은 타인중심적이고, 상대방의 장점에 주목한다. 뿐만 아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것, 행복해 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해주려고 애를 쓴다. 대신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불편해 하는 것을 찾아 고치고 줄여나간다. 그러니까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돈독해지는 것이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주님덕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좋아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일을 찾아서 하고, 주님이 싫어하시고, 주님이 미워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고치고 제거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급속하게 친밀해지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비느하스
민수기 25장에 바알브올의 사건이 나온다. 싯딤에서 모압 사람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바알을 위한 제사에 참여해 바알에게 절을 하고, 음식을 먹고 마시고, 신전 여자사제들과 음행을 행했다. 이에 하나님의 진노로 전염병이 돌아 24,000명이 죽었다. 바알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죽이고, 백성의 수령을 목매달라는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시므온 지파 족장 시므리가 미디안 족장의 딸 고스비를 데리고 자기 장막으로 들어갔다. 이를 본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들을 따라 장막으로 들어가 창으로 두 남녀의 배를 꿰뚫어서 죽였다. 여기서 비느하스의 행동은 단순한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우상숭배로 오염된 이스라엘을 청결하고 거룩하게 바꾼 행동이었다. 비느하스의 분노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거룩한 분노’였다. 이 일로 하나님은 비느하스와 평화의 언약을 맺으셨고(12), 비느하스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셨다(13). 여기서 시므리와 비느하스를 통해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고 싫어하신 일을 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사람의 운명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
본문은 신체의 각 부분인 눈과 혀와 손과 발을 연결하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들 신체는 소중한 것이지만 죄의 도구가 될 수 있고. 그러면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도 죄의 도구로 사용되는 지체에 대해 아주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 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우리 몸의 지체가 죄악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과 죄에 대해서 그만큼 단호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천국은 손과 발을 자르고라도 반드시 가야할 곳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이 싫어하시는, 그래서 우리의 천국 길을 가로막는 일곱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17~19).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교만한 눈
그 첫 번째가 ‘교만한 눈’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따라서 교만한 눈은 교만한 마음을 의미한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이다. 때문에 본문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중에 첫 번째로 교만을 꼽은 것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1,000개의 거울로 된 유리방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서 손을 흔들거나 내밀면 천 명의 사람이 자신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살며시 웃으면 천 명의 사람이 자신을 보고 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손과 웃음은 모두 자신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만한 사람이 이와 같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고, 자신에게 둘러싸여 있고, 자신에 의해 갇혀있다. 교만한 사람의 눈은 자신만을 향해 있고, 그의 귀는 자신을 만족시켜줄 아첨과 찬사의 말에 목말라 있다. 그러다보니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까지 자신이 가로채는 경우가 있다. 유다 왕 헤롯 아그립바가 그랬다. 그는 백성에게 신과 같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가로챘다가 충이 먹어죽었다(행12:21~23).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런데 교만은 이와 같은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래서 허영을 꿈꾸게 만들고, 불순종하게 만든다. 교만한 사람이 결코 주님과 친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만은 경건생활도 왜곡시켜 버린다. 누가복음에 두 기도자가 나온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그들이다.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결코 이는 과장이 아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하지만 또한 잘 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다. 기도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기도를 자신의 경건생활을 자랑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문제다. 이는 전형적인 교만한 모습이다. 이렇게 교만은 경건생활까지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만든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교만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자랑과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멸시와 경멸이다. 자기 자랑을 잘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교만이다. 모든 죄는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고, 회개하여 고칠 수 있지만 자기자랑이나 우월감에서 나오는 교만은 치료가 힘들다. 자신이 가장 잘 하고 있고, 잘 믿고 있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자기성찰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다른 모든 죄보다 교만에 대하여 엄중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18:12, 16:18)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나온 이야기다. 한 곳으로 가니 사람들이 등에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돌의 무게로 가슴이 거의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단테가 물었다. ‘저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러자 안내자가 대답했다. ‘저들은 세상에 살 때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하기에 그 연습을 하느라 저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지 못한 자의 죽음 이후의 불행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교만을 가리켜, ‘모든 죄를 덮는 이불’이라고 했다. 모든 죄가 교만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교만의 치료제
앞에서 교만을 자신이 왜 지음을 받았고, 무엇을 위해 지음을 받았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교만은 자기인식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 자기의 모습을 대면하지 못하고, ‘이상적 자아’(ideal self)를 ‘실제자아’(real self)로 착각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상 심리학자인 솔로몬 쉼멜은 교만의 치유제로 ‘지속적 자기관찰과 자기비평’을 소개했다. 이는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객관적인 자기인식’과 연결된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인 자기인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해 보자. 거울을 보지 않고 어떻게 자기 얼굴을 알 수가 있는가? 거울에 얼굴을 비춰봐야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객관적으로 자기를 인식하려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사람과 같아서’(약1:23). 말씀이 자기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자기성찰과 자기비평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의 거울을 통해 우리는 내가 왜 지음을 받고, 무엇을 위해 지음을 받았는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이유를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제자아(real self), 곧 자신의 현주소와 현재 상태를 알 수가 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자랑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한 우월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 오히려 세리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가슴만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18:13))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고백이 쏟아질 때 자신을 낮추어 비천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고, 자신의 실제자아(real self)를 알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은혜의식이 폭발하여 주님은 물론이고 주변 모두에게 ‘덕분(택)입니다!’ ‘때문입니다!’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교만이 치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만의 치료제다. 우리가 항상 말씀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항상 말씀 안에 머무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교만한 눈(마음)을 제거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한 눈(마음)을 갖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y2fps7JP094 1469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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