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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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2,866회 작성일 22-02-13 12:35본문
욕심 내려놓기
골3:5~6
2022. 2/13. 11:00
잿빛 모래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물이라도 보는 주체에 따라, 보는 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인데, 마음은 한 가닥 길과 같다.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에게는 길도 열리고, 계속 넓어진다. 하지만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 길은 계속 좁아지다가 결국 닫히고 만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똑같은 곳이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주어진 현재를 충분히 누리며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도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잘 반영하는 이야기가 있다.
쑤쑤라는 작가의「인생을 바르게 보는 법, 놓아주는 법, 내려놓는 법」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잿빛 모래쥐에 대한 이야긴데, 이들은 건기가 올 때쯤이면 풀뿌리를 모아 저장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사막을 헤집고 다니며 열심히 풀뿌리를 모은다. 그런데 건기를 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풀뿌리를 저장하고도 이들은 여전히 풀뿌리를 찾아다닌다. 모래쥐 한 마리가 건기를 나기 위해 필요한 풀뿌리는 2Kg정도지만 실제로 모은 양은 10Kg이 넘는다. 대부분을 썩어서 버리면서도 필요이상으로 모은다. 연구에 따르면 모래쥐의 이런 습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이들은 태생적으로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양의 몇 배나 많은 풀뿌리를 모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면서 고생을 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건기에 대한 걱정이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풀뿌리를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된 욕심의 노예로 만든 것이다.
욕심의 무서움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론 제한된 재화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 그대로 살아남아야 하고,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런 걱정과 염려가 동기부여가 되어 일상을 분발하게 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고, 모으면서 준비하게 만든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여기에 욕심이 작용하면서 문제가 된다. 빼앗아서라도 독점하려고 하고, 모래쥐처럼 썩어서버릴지언정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버린다. 한 마디로 욕심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불행한 것은 물론이고, 주변도 불행하게 만든다. 지금 인류가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상황에 놓여있지만 실제로 더 위협적인 것은 빈곤이다. 우리가 잘 사는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이것을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보다 빈곤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쓰레기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한쪽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레기장을 뒤지고 있다. 욕심이 만들어낸 참혹한 모습이다. 지난 2017년도 기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음식물 낭비비용이 무려 20조에 달하고, 1인당 쓰레기 배출량은 1년에 100Kg으로 나왔다. 우리가 음식물쓰레기만 줄여도 북한주민의 식량을 책임질 수 있다고 한다.어떤 분의 글에 보니,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갈 때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버린 쓰레기도 머리에 이고 간다는 말이 있었다. 물론 우리 기독교적 표현은 아니지만 도전이 되었다. 그 동안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데, 생각하니 아찔했다. 쓰레기는 멈출 줄 모르는 우리의 욕심이 만들어낸 부산물인 셈이다.
욕심은 악의 본질이고, 모든 선의 무덤이다. 성경은 죄의 근원이 욕심이고, 욕심의 결말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뿐만 아니라 욕심은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여정 중에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곳이 있다. 탐욕의 무덤이란 뜻인데, 그들이 만나만 먹고는 못 살겠다며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이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 한 달 동안 냄새날 정도로 메추라기 고기를 먹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또 고기를 입에 넣고 있으면서도 불평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메추라기 말고 다른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했다(민11:34). 이렇게 욕심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불평으로 원망으로 바꿔버린다. 더 나아가 기적의 장소를 심판의 장소로, 은혜의 장소를 탐욕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욕심이다.
욕심은 유상숭배다!
본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1~4)에 이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이다. 저자는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를 열거하다가 탐심에 와서 탐심을 강조하며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한다. 우상숭배가 무엇인가?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성경 전체가 가장 경계하는 죄다.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나뉘게 하고, 급기야는 남과 북 왕국 모두를 멸망에 이르게 한 죄가 우상숭배다. 그런데 욕심을 이와 같은 우상숭배로 규정을 한 것이다. 그만큼 욕심이 심각한 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욕심이 우상숭배일까? 우상이란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주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주님보다 더 집중하는 것이다. 욕심이란 죄를 낳기까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욕심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집중하고, 그것을 갖고자 애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과 대척점(對蹠點)에 서게 하는 것이 욕심이다. 그러므로 욕심은 주님과 친밀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소위 ‘경건생활의 원수’다.
성경뿐만 아니다. 불교에서도 욕심을 심각한 죄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오공 이야기가 나오는 중국의 고전소설「서유기」란 책이 있다. 주인공 삼장법사가 저팔계와 손오공과 사오정이란 세 제자를 데리고 서역으로 불서(佛書)를 구하러가면서 겪은 내용이다. 일종의 ‘구도의 길’(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로 말하면「천로역정」과 같은 책이다. 여기서 저팔계와 손오공과 사오정이 각각 독립된 인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실상 이들은 삼장법사의 마음이다. 즉, 탐욕스런 마음, 분노로 가득한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다. 탐욕스런 마음이 저팔계로, 분노로 가득한 마음이 손오공으로, 어리석은 마음이 사오정으로 표현된 것이다. 불교에서 이 세 가지를 ‘탐진치’(貪瞋痴), 곧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 ‘탐’(貪)이 가장 먼저 나온다. 불교 역시 욕심을 가장 심각하게 여기며, 구도에 가장 심각한 장애로 여긴다는 뜻이다.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자!
상황이 이렇다보니 욕심을 비우고, 욕심을 내려놓는 문제가 주요 관심사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욕심을 비우고, 욕심을 내려놓는 것을 중요한 수행과제로 삼고 있다. 이광수의「꿈」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욕심을 내려놓는 불교적 방법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조신이란 스님이 태수의 딸 달례를 보고 연심을 품게 되어 애욕(愛慾)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을 내려놓는 것을 꿈이란 기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인생이란 한순간의 꿈처럼 무상하다는 것, 욕심도 그렇다는 것이다. 인생무상을 알면 어떤 욕심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기독교도 욕심을 내려놓는 법에 대해 불교와 비슷하게 인생은 유한하고 이 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니 땅의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한다. 본문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이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불교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자’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욕구전쟁에서 거듭 실패하자 이렇게 탄식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어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욕구전쟁의 승리는 훈련이나 수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욕심의 해결자’시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이다(갈5:24). 이것으로 모든 욕심과의 전쟁에서 승리가 보장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소 대신 예배
이와 같은 비결을 기가 막히게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이란 책에 나온다. 이 책이 크게 화제가 되었는데,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인 이용규 선교사의 삶 때문이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 가족을 데리고 몽골의 선교사로 떠났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주일, 막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이 범벅이 된 채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이 자매는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인데,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고 소를 찾으러 다니다가 예배시간이 되자, 소 찾는 것을 포기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달려온 것이다. 소 대신 예배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 이 자매에게 소는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것인데 예배를 위해 소를 포기한 것이다. 이 선교사는 자매가 소를 포기하고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한 결단을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예배를 마치자 밖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발러르 자매가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교회로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 내려놓음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것을 얻는 삶이다. 가장 안전하고 값진 투자가 내려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려놓는 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맡기다.’는 히브리어로 ‘갈랄’(גָּלַל)인데, ‘옮기다.’, ‘굴리다.’, ‘신뢰하다.’는 뜻이다. 주님을 신뢰하여 주님께 모든 것을 굴러 보내는 것이다. 욕심도, 걱정도, 염려도, 불안도, 문제도 굴러 보내는 것이다. 내 삶의 모든 것을 굴러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맡기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해결자이신 주님께 책임져 주신다. 이렇게 다 내려놓으니까 주님께 집중하게 되고, 주님과의 친밀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h0DQR8c3CeM 1547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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