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중에도 기뻐하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419회 작성일 22-02-06 12:46본문
시험 중에도 기뻐하기
약1:1~5
2022. 2/6. 11:00
인삼과 산삼의 차이
인삼과 산심의 차이를 아는가? 인삼과 산삼의 차이는 DNA(종자)의 차이가 아니라 심겨진 장소의 차이다. 똑같은 씨가 자라기 힘들고 열악한 환경인 산에 뿌려지면 산삼이 되고, 좋은 환경인 밭에 뿌려져서 평범하게 자라면 인삼이 된다. 열악한 환경에 뿌려진 씨가 산삼이 되는 이유는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뭔가 특별한 물질을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만들어낸 물질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산삼을 만든다. 산삼에는 인삼에 없는 각종 미네랄 성분이 40여 가지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여건이 잘 갖춰진 좋은 환경에서 자란 인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분이다. 또 인삼은 6년이면 다 자라지만 산삼은 아주 조금씩 자란다. 일 년에 몇 밀리씩만 자란다. 그래서 적어도 산삼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자라려면 15년 이상이 걸리고, 어떤 것은 수백 년 된 것도 있다. 인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느리게 조금씩 자라지만 그 결과는 인삼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약효를 만들어낸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고난의 시간을 지나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된다. 다는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거나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될 때 더욱 간절하고, 절박하게 주님을 찾고,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급속히 깊어진다. 사실 주님께서 믿는다고 하여 우리의 어려움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큼은 끝까지 거두지 않으신 것이 있다. 그것은 동행의 은혜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리 곁을 꼭 지켜주시는 은혜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낙심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맞서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하면서 주님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관계도 챙기고, 덤으로 어려움도 넘어서게 된다. 벌써 코로나19가 3년째로 접어들었다.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이 어려움이 속히 지나가기를 기도해야겠지만 함께 힘들어하시고, 아파하시며.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친밀하게 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에 대한 태도
본문은 여러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씀이다. 야고보서는 바울서신처럼 어느 특정 교회나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1절에 나와 있는 대로 당시 각지에 흩어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신앙공동체에게 보낸 편지다. 이런 편지를 가리켜 여러 교회가 돌려가면서 읽도록 기록된 ‘공동서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기록목적은 곧 불어 닥칠 믿음의 시련을 잘 극복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간단한 인사에 이어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여러 시험에 대한 태도인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2). 저자는 시험에 대한 태도를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는 것이고, 둘째는 시험을 만나거든 ‘기도하라는 것’(5)이다. 여기서 기도는 시험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험을 만났을 때 가져야 할 첫 번째 태도인 시험을 기쁘게 여기는 비결이기도 하다. 어떻게 시험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주님께 기도하여 위로부터 힘을 공급받는 길밖에 없다. 기도할 때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시험 중에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경 여러 곳에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혹은 시험 중에 있는 사람에게 기도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하셨다. 기도하라는 뜻이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누구도 어려움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 어려움이다. 이 어려움은 예측할 수 없이 다가오고,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야보고서 저자는 이런 여러 어려움에 대해 성도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는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특히 신앙생활로 인하여 겪게 되는 어려움, 곧 믿음의 시련을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그것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3).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있는데, 그가 204년에「인내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이는 기독교인이 쓴 최초의 논문이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 공동체에서 인내의 역할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기초를 세웠다. 그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모든 성도에게 가장 높은 덕은 인내라고 했다. 그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원인을 ‘조급증’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고 했다. 사실 주변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나 사고 대부분이 참고 기다리지 못한 결과 일어난 것이 많다. 어떤 분의 글에 보니, 하늘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물에 하자가 있거나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리며 기도를 했으면 응답을 받았을 텐데 인내하지 못해 참고 기다리지 못해 응답이 되돌아왔다는 뜻이다. 야고보 저자는 바로 이 소중한 인내가 어려움을 통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원래는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믿음의 시련이 이 소중한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해도 이를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둘째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4). 이는 믿음의 시련(어려움)을 통해 완벽하고 흠 없는 온전한 사람이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련의 목적이고, 시련을 극복해 낼 때 얻게 될 열매다. 그런데 이런 시련의 끝에 있게 될 열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인내가 있다. 시련을 통해 만들어진 인내가 시련의 끝에 이르기까지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4a)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경은 내가 인내를 이루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원문은 인내가 온전히 일을 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즉, 시련을 통해우리를 완벽하고 흠 없이 온전해 바랄 나위없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데 인내가 온전히 일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온전하고 구비하여’는 신앙적 ‘성숙’(mature)과 인격적 ‘온전함’(complete)을 뜻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믿음의 시련이 우리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온전한 교제로 이끈다는 뜻이다. 그러니 믿음의 시련이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이를 기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특히 헬라어로 시련과 인격은 같은 단어다(δοκιμή). 이는 시련을 통해 인격이 만들어지고, 혹은 시련을 통해 인격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즉, 주님과 친밀한 교제, 온전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성숙한 신앙적 인격을 갖추게 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와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이다. 티백을 하나 가지고 왔다. 이 티백만 가지고는 이 속에 담긴 차의 종류와 맛과 향, 그리고 빛깔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이것을 뜨거운 물에 담그면 이 속에 있는 차가 무슨 차인지, 차의 맛과 향, 빛깔도 알 수가 있다. 인격이라는 맛과 인격이라는 향, 그리고 인격이라는 빛깔도 시련의 뜨거운 물을 붓거나 뜨거운 물에 담글 때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시련은 일종의 기회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증명하고 확인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믿음의 시련이 주는 유익이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통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온전한 교제로 나아가게 되고, 또한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기회가 되니여러 어려움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우뚝 설 날을 기대하며
삿갓조개를 아는가? 바닷가 바위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밑창에 화석처럼 붙어서 사는 것이 삿갓조개다. 바위 자체를 깰 수는 있어도 바위에 붙어 있는 삿갓조개는 뗄 수가 없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삿갓조개가 바위에 이렇게 강하게 붙어있는 이유 중 하나로 파도를 꼽는다. 파도의 힘은 시속 500Km의 엄청난 바람의 세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강한 파도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바위와 한 몸처럼 바위에 달라붙어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단 한 번의 파도에도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삿갓조개로 하여금 절박하게 바위를 붙잡게 만든 것이다. 이런 비슷한 사례를 주변에도 볼 수가 있다.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이나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을 보라!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전도구를 착용하고, 그래서 자신이 선택했으면서도 위기의 순간이면 소리를 지르고, 기구를 꼭 붙잡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의 위기가 절실하고 절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믿음의 시련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믿음의 시련이 주는 유익을 몇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바꿔놓는 것이다. 위태로운 환경이 삿갓조개로 하여금 바위에 단단히 붙어있게 만든 것처럼 믿음의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고, 주님을 찾게 하고, 주님께 부르짖게 하고, 주님을 단단히 붙잡게 만든다. 그래서 주님께 단단히 묶이게 만든다. 마치 안전벨트(safety belt)처럼 말이다. 우리를 주님과 단단히 묶어주는 안전벨트와 같은 것이 믿음의 시련이다. 그래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든다.
어떤 분이 지난 설날에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에게는 설날보다 앞으로 우뚝 설 날이 더 많다.’ 그렇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 설 날이 있을 것이다. 특히 믿는 우리는 언제가 우리 주님 앞에서 우뚝 설 날을 기도하고 기대해야 한다. 이런 기대가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확신이 되게 하려면 일상에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갖는 것이다. 이 땅에서 날마다 주님과 친밀함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장차 주님 앞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그 비결 중에 하나가 믿음의 시련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면서 주님만 바라보는 기회, 주님께 더 깊이 엎드리는 기회, 더욱 간절히 부르짖는 기회, 더욱 절박하게 붙잡는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단단히 주님께 묶이는 것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hYv0TB5Xj3Q 15097회 연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