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되게 하는 사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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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703회 작성일 13-04-07 15:05본문
잘되게 하는 사람, ‘요셉’
창39:1~6
2013. 4/7. 08:00, 11:00
라면왕의 이야기
우리나라 산업발전 뒤에는 ‘라면’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라면은 돈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식사대용으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식품이다. 그런데 이 라면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라는 사람이다. 2차 대전 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것이 그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궁리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누구나 값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958년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치킨라면)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1971년에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컵라면’을 개발, 식품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라면회사를 만들어 큰 성공을 이뤘다. 남을 잘되게 했더니 자신도 잘되게 된 것이다. 그의 경영철학(①食足世平, ②食創爲世, ③美健賢食)에 이와 같은 자세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물가안정정책 일환으로 대형마트에 가격조정요구를 했는데, 이것이 중소납품업체의 가격하향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대형마트가 자신들의 손실비용을 납품업체에게 떠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윤추구가 기업의 목적이라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남을 무너뜨리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단체나 개인은 결코 형통할 수 없다. 라면의 왕 안도처럼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자신도 잘된다는 사실을 우리 기업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곧 상생(相生)의 원리이고, 또한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형통의 원리이기도 하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어떻게 나와 함께 한 사람, 나를 만나는 사람을 잘되게 하고, 내가 있는 곳을 복되게 할까?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고, 사명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환영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존중받는다. 요셉이 바로 남을 잘되게 하고, 자신이 있는 곳을 잘되게 한 사람이었다.
운명이 바뀐 요셉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1).
요셉을 구덩이에 가둬놓고 즐겁게 식사를 하던 요셉의 형들은 한 떼의 상인을 발견한다. 그 때 유다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죽게 하느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을 했고, 다른 형제들이 그 제안을 좋게 여겼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미디안(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팔아버렸다(창37:28). 요셉은 구덩이에서 구출은 되었지만 이제는 미디안 상인들의 노예가 된 것이다. 또 다른 구덩이에 갇히게 된 셈이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 노예시장에서 이집트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갔다(1).
형들이 죽이고 싶을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부잣집의 귀한 아들이 하루아침에 낯선 이국땅에서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심지어는 부모형제까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엄청난 꿈을 가진 사람이 주인의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이 달려있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그 절망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거나, 혹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더 심한 곤욕을 치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노예로서 충심으로 주인에게 헌신했다. 보디발은 이런 그를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맡겼다(4,6). 보디발이 나이 어린 이방인 노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은 그 만큼 요셉이 충실하여 신뢰를 주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은 비록 종살이를 하고 있지만 요셉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①(범사에)형통한 자(2), ②(그 주인에게)형통함을 보여주는 자(3), ③(주인과 그 집을)형통하게 하는 자(5). 이는 우리 신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고, 사명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 요셉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2).
사실 ‘형통한 자, 형통함을 보여주는 자, 형통하게 하는 자’는 종살이를 하고 있는 요셉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이다. 생각해 보라. 귀한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 사람이 어떻게 형통한 자인가? 자기 형들에게 노예로 팔린 자가 어떻게 형통함을 보여줄 수가 있고,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힘든 노예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형통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정말 요셉은 형통한 자였고, 주인에게 형통함을 보여준 자였고, 주인과 주인의 집을 형통하게 하는 자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2,3,5).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게 이제 그의 보호자는 아무도 없고, 어디에도 없었다. 자기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을 누가 돌봐주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디발의 집 역시 광야의 메마른 구덩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절망의 장소에서 그를 만나 주셨다. 아버지는 곁에 없고, 형들은 외면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를 인도하셨다. 형들이 그를 이스마엘(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것도, 보디발이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서 산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 일부였다. 그렇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고(마10:29),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30) 계신다고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훗날 요셉이 자기에게 행한 형들의 이 만행을 선뜻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 사건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로 이해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냈나이다.”(45:5)라고 말했다. 형들에 의해 비참한 노예로 팔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비록 노예였으나 그는 형통한 자였고,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을 형통하게 하셨다(5). 잘되게 하고, 복을 받게 하셨다. ①형통함, ②형통함을 보여줌, ③형통하게 함.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비록 노예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 형통하고, 형통함을 보여주고, 형통하게 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요셉이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신뢰를 받게 된 것이다(4).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고 인정을 받게 되는 법이다. 우리가 신자로 살면서도 우리의 삶이 형통하지 못하고, 형통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형통하게 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고 했다. 나를 결정한 것은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뜻이다.
주변을 잘되게 한 요셉 “......요셉을 위하여......”(5).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요셉의 형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꿈을 짓밟고 찢는 사람과, 요셉처럼 다른 사람을 ‘잘되게’, ‘복되게’,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요셉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5절에,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산에 미친지라.”고 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모든 소산이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랬다. 요셉 때문에 간수와 죄수들이 복을 받았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는 온 나라와 주변 국가들까지 복을 받았다. 심지어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그의 부모, 그를 이국만리에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도 복을 받게 했다. 그래서 이집트 왕 바로는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Zaphnathpaaneah)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생명을 주는 사람’(life-giver)이란 뜻이다. 야곱의 임종기도(창49:)에서도 야곱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고 축복했다. 요셉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풍성하고 잘되게 복되게 하리라는 뜻이다. 요셉은 복덩이다. 교회의 복덩이, 가정의 복덩이, 일터의 복덩이였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신자는 주님 덕에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은혜로 살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그것을 주변에 나누며 살아야 한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형통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하도록 해야 한다. 나 때문에 가정이 행복하고, 나 때문에 교회가 복을 받고, 나 때문에 회사가 잘되고, 나 때문에 아내가 행복하고, 나 때문에 남편이 행복하고, 나 때문에 자녀가 행복하도록 해야 한다. 주변을 잘되고 행복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바로 주님을 믿는 ‘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요셉의 삶이었다. 우리도 이런 아름다운 요셉의 삶을 닮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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