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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던져진 사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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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254회 작성일 13-03-31 14:13

본문

구덩이에 던져진 사람, ‘요셉’

창37:18~28

2013. 4/31. 11:00(부활주일)

 

질투의 여신, 인비디아(invidia)

질투(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로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인비디아는 로마신화에 나온 질투의 여신이다. 신화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비디아는 어둡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집에 살고 있다. 그 집은 햇살이 비치기는커녕 바람도 한 점 불지 않는 깊은 계곡에 있다. 이 집은 손가락이 굽을 만큼 춥고 불기가 없는 데다 햇빛이 비치지 않아 늘 어둠에 잠겨 있다. 그녀는 마성을 돋구어주는 뱀의 살을 먹기도 한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다. 게다가 지독한 사팔뜨기이다. 이빨은 변색된 데다 군데군데 썩어 있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있다. 그녀의 입술에 미소를 감돌게 하는 것은 남이 고통받는 광경뿐이다. 그녀는 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밤이고 낮이고 근심과 걱정에 쫓기고, 남의 좋은 꼴을 보면 속이 상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나날이 여위어간다.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만큼 저 자신만 녹아나는 것이 바로 인비디아다.

 

한 마디로 ‘인비디아’는 아주 역겨운 여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사팔뜨기’라는 부분은 질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곁눈질, 남의 눈치, 비교의식에서 시작된 질투는 결국 눈을 흘기게 하는 분노를 만들어낸다. 지난 목요일(28) 새벽에도 말했지만 이 질투는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잘못된 감정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일상생활을 무너뜨리며, 결국에는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질투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뻐하고, 행운에 애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그것을 은밀히 도모하는 질투는 죄질이 가장 추하고 악하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 이 질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7대 대죄로 꼽았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여 저주의 주인공이 된 유대인의 악행도 이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질투는 영적인 생활과 성장에 심각한 장애다. 창37장에 묘사된 요셉의 형들 역시 질투의 화신이다. 그들의 질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나았는지 본문이 잘 보여주고 있다.

 

요셉의 형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고, 막내는 베냐민이다. 둘 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태어났다. 그 라헬이 벧엘에서 에브랏(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서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다(창35:16~18).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야곱은 라헬을 생각하는 마음과, 그녀에 대한 못다한 사랑을 그녀의 소생 요셉과 베냐민에게 쏟았다. 특히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3). 당시 옷을 만드는 것은 지금 자동차를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히 여러 색을 넣은 옷을 만드는 일은 더욱 그랬다. 모두 천연 염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 겉옷은 손목 발목까지 덮는 왕자나 공주가 입는 그런 고급 옷이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표시 나는 사랑(편애)은 다른 형제들이 그를 질투하여 미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요셉이 아직 미숙하여 형들의 비행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였고(2), 부모와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 이야기까지 해댔다(5~11).

 

아버지의 표시 나는 사랑에도 마음이 상해 있었는데, 그 사랑을 믿고 고자질을 하고, 부모형제가 자기 앞에 엎드리는 꿈을 꾸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니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고운 사람은 무슨 짓이든 곱게 보이지만 미운 사람은 하는 짓마다 밉게 보이는 법이다. 형들 입장에서 보면 요셉은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참으로 얄미운 존재였다. 그래서 형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요셉에게 해코지를 하고, 아울러 요셉 밖에 모르면서 자신들의 어머니와 자신들을 홀대한 아버지에게 복수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너무 쉽게 찾아온 것이다. 그들이 세겜을 거처 도단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아마도 몇 년 그의 아들들이 세겜에서 저지른 만행 때문에 마음이 쓰인 듯함)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요셉이 그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

 본문을 보면 어렵게 형들을 찾아 기뻐하는 요셉과는 달리 형들은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20). 요셉을 죽여서 요셉 밖에 모르는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고, 그 잘난 꿈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찢어버리자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그들은 더 이상 형제도 아들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요셉과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다행이 르우벤의 만류로 자신들이 직접 죽이지 않고 물이 없는 구덩이에 넣어 스스로 죽도록 하자고 뜻을 모았다(21,22). 그래서 그들은 요셉이 오자 붙잡아 그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다(23,24). 그리고는 살려달라는 동생의 간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둘러앉아서 즐겁게 음식을 나눠먹었다. 참으로 잔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두가 어쩌면 그렇게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 그 현상과 정확하게 겹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요셉을 주님의 그림자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질투의 특징이고, 또한 질투에서 비롯된 미움의 특징이다. 동생도 부모도 아랑곳 하지 않는 것이 질투이고, 미움이다. 정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일요3:15)라고 하는 말씀이 실감이 난다.

 

본문에 ‘구덩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온다(20,22,24,28). 일반적으로 구덩이를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데, ‘음부’ 혹은 ‘지옥’이란 뜻이다. 음부(지옥)는 ‘희망이 차단된 희망이 없는 장소’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구덩이는 일반 물웅덩이가 아니라 사막에서 물을 잘 저장할 수 있고, 저장한 물의 증발을 막을 수 있도록 입구는 좁게 하고 중심은 넓게 판 호리병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저장한 물을 다 쓴 빈 구덩이는 때때로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들어가면 절대로 혼자서는 나올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바로 이와 같은 구덩이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구덩이를 ‘음부’(지옥)처럼 희망이 없는 장소, 희망이 차단된 곳이라고 한 것이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구덩이

그렇지만 요셉에게 있어서 구덩이는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형들은 그를 구덩이에 던짐으로 그의 꿈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오히려 그 구덩이는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요셉에게 이 구덩이 체험이 없었다면 그의 꿈은 절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다. 사실 요셉의 꿈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이고, 요셉은 도구였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덩이의 시련을 요셉에게 보내서 그를 준비시킨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꿈을 찢고 짓밟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짓밟고 찢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은 사람의 방해로 좌절되지 않고 방해를 받을수록 더욱 크게 성장하고, 부흥하게 된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좌절시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 꿈을 더욱 크게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계획까지 선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요셉에게 중요한 배경이 되고, 버팀목이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었다. 그런데 그가 던져진 구덩이 안에는 그 아버지가 없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 할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깨우쳐 준 곳이 구덩이다. 한 마디로 그 구덩이에서 인생에 있어서 의지해야 할 대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 붙잡아야 할 대상, 추구해야 할 가치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그 구덩이 체험을 통해 변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 물론 사람에게 어느 곳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듯이 요셉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후 그가 어디에 있든 형통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도,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는 항상 형통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내 인생의 구덩이

그 어떤 환경이나 사건이나 존재도 신자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선언이고 고백이다. 그 이유는 신자는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의 구덩이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살다보면 우리도 이런 절망의 구덩이, 슬픔의 구덩이, 실패의 구덩이, 불안과 염려의 구덩이, 고통의 구덩이에 갇힐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10대, 어떤 사람은 20대, 어떤 사람은 30대, 40대, 50대, 60대.......통계적으로 젊은 시절보다 나이가 들면 이런 구덩이가 더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인생의 희망이 차단당하는 절망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다시는 내 힘으로 헤어날 수 없는 파국에 내몰려 스스로 생을 포기할 지경까지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덩이는 내 인생의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곳은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요셉의 생애가 이를 증명해 준다. 요셉은 10대에 형들에 의해 이런 구덩이에 던져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곳은 죽음의 구덩이가 아니었다. 새롭게 살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구덩이였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2)는 다윗의 고백처럼 그 구덩이는 장차 만인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것이 곧 부활의 정신이고, 부활의 신앙이다. 이런 부활정신, 부활신앙으로 인생의 어떤 구덩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과 기쁨, 영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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