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된 떠남, ‘아브라함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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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0,678회 작성일 13-01-13 15:01본문
복이 된 떠남, ‘아브라함Ⅰ’
창12:1~5
2013. 1/13. 08:00, 11:00
斷捨離(단사리)
요즈음 일본에서 ‘단사리’ 운동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물건이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온함을 찾으려는 요가철학에서 따온 말이다. ‘끊음’(斷), ‘버림’(捨), ‘떠남’(離)에 대한 한자어다. 이 단사리가 마음의 평온을 찾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사실 악연 혹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상대방에 대한 분노나 원한을 ‘버리고’, 복수라는 이 세상의 법칙으로부터 ‘떠날’ 때 비로소 용서가 이뤄지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끊고, 버리고, 떠남이 있어야 신앙의 성장과 성숙, 변화를 기대할 수가 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는데도 아무런 변화나 성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마귀 편에서 보면 참으로 심지가 굳은 초지일관한 사람일 것이다. 이들은 마귀는 기쁘게 하겠지만 주님은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마땅히 끊어야 할 것들을 끊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떠나야 할 것들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배가 출항하기 위해선 포구에 묶여있는 줄을 끊어야 하고, 하중 때문에 속도 느려지거나 가라앉을 때는 짐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물을 계속해서 뒤로 떠나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생활을 경주(競走)에, 신자를 경주자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
신앙은 떠남이다.
신앙은 떠남이다. 죄로부터 떠나고,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고, 온갖 우상숭배에서 떠나고, 세속적인 악한 사상에서 떠나고, 경건하지 못한 습관과 생활에서 떠나고, 경건치 못한 사람들과 환경에서 떠나고, 악한 마귀와 그 권세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떠난 사람들이다. 본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내용이다. 그것은 ‘떠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것은 ①고향과 ②친척과 ③아버지의 집이다. 이들은 실재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첫째, 삶의 터전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은 잔뼈가 굵어왔던 삶의 터전이다. 현재 생활하고 있는 삶의 터전을 떠나고, 삶의 근거를 바꾸라는 도전이다. 특히 여기서 ‘고향’은 세상이다. 육체로 살던 삶의 터전이고, 삶의 방법과 방식을 모두 포함한다. 신앙은 바로 이런 고향을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살았던 삶의 터전인 이집트를 떠나야했듯이 반드시 옛 삶을 떠나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그래서 성경 도처에서 이 떠남이 강조되고 있고(엡4:22, 골3:5,8), 특히 시편은 떠남이 곧 복 있는 삶이라고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1). 악인들의 충고나 삶의 방식(태도), 교제에서 떠난 것이 복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세상 것은 모두가 정욕의 것이고, 마귀의 적이기 때문이다(약3:15). 주님 역시 제자들에게 떠남을 강조하셨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아내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주님을 따르는 그 시작이 삶의 터전인 고향(배와 그물과 아버지, 그리고 잡아놓은 물고기)을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눅5:11). 영적인 삶은 육적인 삶의 터전을 떠남부터 시작된다. 이스마엘(육신의 자녀)과 이삭(약속의 자녀)이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창21:9~10,14).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끊고, 버리고, 떠나야 그곳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 주님의 능력이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익숙함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익숙한 것이 편하니까! 낯설면 불편하다. 그래서 익숙한 장소, 익숙한 물건, 익숙한 일, 익숙한 음식, 익숙한 냄새, 익숙한 태도(자세), 익숙한 사람 등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사람에게는 안주하고 싶은 마음, 현실의 편안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은 모두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고, 편안함을 주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떠나라는 명령은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끊고, 버리고, 떠나라는 것, 새로움을 향하여 도전하라는 것이다. 나고 자란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을 떠나고, 한 지붕 아래에서 의지했던 식구들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 모두가 쉽지 않는, 자신의 사지를 꺾는 고통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보고에 따르면 당시 갈대아 우르에는 약 25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고, 2,3층짜리 벽돌집이 발견되는 문명이 발달된 도시였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편리한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것들을 뒤로하고 떠나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무튼 익숙하고 편한 것들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 할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하고 타성에 젖게 한다. 도태되고 망하는 지름길이 된다. 이것은 신앙생활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좋은 예가 모토롤라와 노키아다. 1997년까지 휴대폰 시장의 1등은 모토롤라였다. 그런데 모토롤라는 1등 기업이라는 자만과 현실안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다. 그저 익숙한 휴대폰을 가지고 소비자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반면에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스노우 타이어와 고무보트를 만들던 작은 기업에 불과하던 노키아는 달랐다. 이 회사는 환골탈퇴의 심정으로 익숙한 것들을 다 버렸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여 단숨에 휴대폰 시장에서 모토롤라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타성이 기업을 망하게 한다. 기업뿐만 아니라 신앙도, 인생도, 가정도, 교회도 병들게 하고 망하게 만든다.
셋째, 과거의 영향력을 의미한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부모와 형제들)은 나의 배경이고, 울타리고, 후원자이고 보호자이다. 한 마디로 나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내게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미루고 지체하다 주저앉게 만드는 것들이다. 사실 이 부분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숙제였다.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지만 가나안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하란에서 오랫동안 지체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데라 때문이다. 당시 하란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의 중간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 활동이 활발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다. 데라는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고, 족장인 아버지가 그곳에 머물겠다는데 아브라함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야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 아브라함의 소명 시기와 장소가 창세기(11:30)와 사도행전(7:2,3)이 차이를 보인 것은 창세기는 당시 아브라함 가문의 족장인 데라를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사도행전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아버지 때문에 하란에서 오랫동안 지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미루게 하고 지체하게 만든 모든 영향력의 상징이다. 데라라는 이름이 ‘지체하다.’, ‘미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그 다음에는 조카 롯이 그랬고, 이스마엘, 심지어는 이삭까지도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신앙적 성장과 성숙, 변화)을 가로막는 영향력들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떠나보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다(창22:12). 거의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를 거쳐 떠남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 떠남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미루거나 지체하게 하는 것들을 날마다 떠나보내는 훈련의 연속이다.
떠남, 또 다른 축복
축구황제 펠레는 어린 시절 맨발로 축구를 해야 할 만큼 가난했다. 축선 선수였지만 생계를 위해 병원 청소를 부업으로 하는 아버지를 통해 체력과 기술을 연마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축구의 기본기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어느 날, 어린 펠레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담배를 피우다 아버지에게 들켰다. 그는 단단히 혼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는 재능이 많으니 앞으로 일류 선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90분 동안 마음껏 운동장을 누빌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스스로 선택해라.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싶거든 얻어 피우지 말고 사 피우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고는 낡은 지갑에서 그의 손에 담배 살 돈을 쥐어 주었다. 그 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고 축구연습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월드컵 3연패라는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떠남이 그에게 복이 된 것이다.
신앙이란 떠나는 것이다. 삶의 터전을 떠나고, 익숙한 것들을 떠나고,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목숨을 담보해야 할 만큼 힘들고 어렵다. 말 그대로 십자가의 길이다. 그렇지만 신자라면 누구나 순종해야 할 일이다. 비록 좁은 문을 통해 걷는 좁은 길일지라도 주님이 가신 길,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 아브라함도 그랬다. 우상장사의 아들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되는 복을 받았다. 바로 떠남의 복이다. 이런 복을 기대하며 끊고, 버리고, 떠나는 훈련에 날마다 매진하기를 바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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