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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이 기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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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5-08-3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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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이 기도가 되다.

3:1~19

2025. 8/31 11:00(성령강림 열세 번째 주일)

재앙에 휩싸인 욥

욥기는 재앙과 같은 재난을 당한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큰 부자였는데, 하루아침 모든 재산이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 10명의 자녀까지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의 몸은 심한 악창으로 살이 문드러졌고,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이 모든 일이 이유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욥은 범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 하니라.’(1:20~22, 참고 2:10). 그리하여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냐.’(1:9)라고 비아냥댔던 사탄의 말을 완전히 쓸데없이 만들어 버렸다. 사실 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을 준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나는 형통하기 때문에 믿는 척하는 것은 아닌가?’ ‘모든 조건이 사라져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따를 수 있는가?’

 

아무튼 끔찍한 재앙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욥의 태도는 사탄의 계략을 무력화시키고, 본서 서론에서 소개한 욥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었다. 본서는 욥과 그의 재산과 그의 일상을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시작하고 있다(1:1~5). 특히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b)라고 소개한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의인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다. 한 마디로 욥이 의인의 모델이란 뜻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대가 천상으로 바뀌고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탄을 포함한 천상회의가 열리고,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어디서 왔는지물으셨다. 이에 사탄의 대답이 오싹하다.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1:7b). 사탄이 우리에게 침투하여 공격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와 우리 주변을 항상 맴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자 본서가 서론에서 욥을 소개한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셨고(1:8),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욥이 그토록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 것은 까닭이있다는 것이다(1:9). 만약 하나님께 그 이유를 제거하시면서 욥 역시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했다(1:10~12). 그래서 결국 욥에게 이런 재앙이 쏟아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욥은 하나님을 욕한 대신 찬양하고 경배했다. 이로써 사탄의 말이 틀렸음이 증명되었고, 사탄은 하늘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땅으로 내려와 욥의 친구들을 통해 욥을 흔들어 댄다. 이 내용이 욥기의 본론이다. 사실 욥과 그의 네 친구 간의 논쟁 핵심도 어찌 까닭 없이~’라고 한 사탄 주장의 연장이다. 단지 내용과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다. 욥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탄식으로 자신의 고통을 쏟아낸 욥

본문은 욥의 첫 번째 독백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동시에 욥이 당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들과의 논쟁을 촉발시킨 내용이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끔찍한 일을 당한 욥은 말을 잃고 신음소리만 토해내며 깊은 침묵 속에 잠겨있었다. 한걸음에 달려온 친구들 역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욥의 곁에 앉아 눈물만 삼키고 있었다. 이 장면은 함께 있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진정한 위로자는 조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그냥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침묵이 깨지면서 제한된 자신의 경험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간적인 지혜를 통한 주장이 시작되고, 오해가 자라고, 고통이 깊어졌다. 그 원인의 제공자가 욥이었다. 욥은 1주일 동안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그리고 탄식으로 자신의 고통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욥의 탄식을 그의 친구들이 오해를 한 것 같다. 그동안 꾹 참고 있던 그들이 입을 열어 일제히 욥을 공격했다. 그들 역시 사탄의 말처럼 까닭 없이 욥이 재앙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의롭게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이런 일이 욥에게 일어났다는 것은 욥이 그에 상응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욥이 당한 재앙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욥이 침묵을 하고 있었기에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고, 그러면서 욥이 스스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욥의 말은 고백이 아니라 탄식이었다. 듣기에 따라 탄식은 불평과 원망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문제는 친구들이 욥의 탄식을 이렇게 들은 것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는커녕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욥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입을 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여러 경험과 조상의 지혜와 비유, 그리고 그들이 믿고 있는 전통적인 신학을 동원하여 설득하며 권면하다가 통하지 않자 비난하고 정죄를 했다. 위로는 사라져 버리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격한 감정의 말들만 난무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통의 자리에는 정답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사람이 필요하다. 고통의 자리는 정답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자리는 함께 묵묵히 머물러주는 사람, 말을 아끼는 사람, 무슨 말이든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상처를 싸매기 전에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자리다. 욥의 친구들이 말없이 일주일을 그의 곁에 있을 때 그들은 위로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을 깨고 말을 함으로 위로자에서 고통을 주는 자가 되었다. 그들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욥에게 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욥을 찔렀다. 마찬가지로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탄식은 기도였다.

욥의 첫마디는 놀랍게도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말이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그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3~4). 욥은 자신의 삶, 자신의 시작, 자신의 존재 뿌리를 저주하고 부정하였다. , 자신이 태어난 날, 그날을 기뻐했던 가족의 환호,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의 몸조차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고 했다. 이는 단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실수였던 것 아닐까? 라는 실존적 질문이다. 그는 죽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랬다. 그는 지금 세상에 대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삶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물었다. ‘왜 태어나게 하셨는가?’ ‘왜 젖을 빨게 하셨는가?’ ‘왜 지금도 나를 죽이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가?’ ‘왜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에게 삶을 계속 허락하시는가?’ 이런 모든 질문은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결단이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말이다. ‘탄식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을 지켜볼 것이라는 전제가 남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욥의 이 부르짖음은 탄식이고, 이 탄식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언어다. 욥은 이 언어로 하나님께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탄식은 곧 기도다. 욥의 탄식은 하나님을 떠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본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할 고통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로 고통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탄식은 이후 친구들과의 논쟁과 변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대화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침묵 끝에서 나온 탄식, 그것은 욥의 첫 번째 기도였다. 사실 기도는 살고 싶어하는 자의 부르짖음이고, 탄식이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기도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탄식을 기도로 바꾸려면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의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은 탄식이 된다(욥과 한나). 그렇지만 그에게 탄식은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고, 거룩한 몸부림이 된다. 평탄할 때는 어린이나 약한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괴롭고 힘들 때는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 믿음이란 자동차로 말하자면 주행의 속도를 바꾸고 방향을 바꿔주는 변속기와 같다. 그래서 믿음은 탄식을 기도로, 두려움을 용기로, 절망을 소망으로, 불신을 신뢰로, 불평과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꿔준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가지는 태도다. 욥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탄식을 기도로, 재앙을 찬양과 경배로 바꿀 수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탄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 낭비되지 않을 것이다(욥의 회복. 참고 42:7~).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는 촉매가 될 것이다. 결국 고통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크고 확고한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통해 우리를 붙드시고, 결국 믿음의 자리로, 승리의 자리로 이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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