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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없는 시대에 희망을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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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50회 작성일 25-03-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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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없는 시대에 희망을 만든 사람

삼상1:9-18

2025. 3/2 11:00

창조적 소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nybee)가 즐겨 쓴 용어가운데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 ‘창조적 소수와 지배적 소수’(The Creative Minority and the Dominant Minority)라는 말이 있다. 그의 책역사의 연구에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바로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밑바탕이 되어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류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결과물, 외세의 도전에 잘 대처한 문명이나 역사는 발전과 번영으로 계승되어 온 반면 그렇지 않은 문명과 역사는 퇴보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여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다수의 군중이 아니라 몇 명의 뛰어난 이상과 의지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바로 이들이 창조적 소수. 이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국가의 문명과 역사는 발전하고 번영하지만 창조적 소수가 지배적 소수로 바뀌면 쇠퇴하여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흥망성쇠는 도전에 대한 강한 응전의 저력을 갖춘 깨어있는 창조적 소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역시 언제나 깨어있는 신앙을 가진 영적인 창조적 소수를 찾고 계시고, 이런 사람을 통해 의미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 사무엘서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본문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한 여인의 무릎에서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불임의 시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사시시대는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행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영적 윤리적인 혼란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의 끝자락, 곧 마지막 사사 사무엘의 출생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사무엘은 시골 제사장 엘가나와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통을 받은 한나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탄생에 앞서 그의 어머니 한나의 불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한나가 자신의 불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불임은 고통을 넘어 수치였다. 그래서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위로에도 멈추지 않고 홀로 불임의 고통과 처절하게 싸웠다. 물론 그 방법은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불임의 고통은 간절함을 가져왔고, 간절함은 기도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복을 불러왔다. 원통해서 기도했는데, 애통하며 기도했는데, 시대를 바꾸는 지도자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 그 자체다!

 

 

본문에서 한나의 불임은 그저 한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사사시대 말기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영적으로 불임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미 가나안 지역에서 변방이 되어버렸다. 블레셋은 요단강 좌우를 아우르는 가나안 중심부를 장악하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마치 여러 자녀를 둔 브닌나가 불임 상태의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한 것과 같은 형국이다(6). 이스라엘의 내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제사장(엘가나)은 아내를 둘이나 두고 있었고, 중앙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엘리)은 기도하는 것과 술 취한 것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영적 분별력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자식들(홉니와 비느하스)은 불량자였다. 불량자란 악마의 자식이란 뜻이다. 우리 성경은 이를 완곡하게 표현하여 행실이 나빠’(2:12)라고 번역하고 있다. 모범이 되어야 할 제사장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제사장이 이 모양이니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치, 사회, 종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시대였다. 한나의 불임은 이런 시대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한나는 자신의 불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나가 일어나니

우선, 한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매몰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행동을 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9a). 여기서 일어나다.’(바타콤, ותקם)라는 이 동사의 시제가 단회적인 사건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단순과거형이다. 이는 반복되는 갈등과 절망의 순환을 끊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자 하는 한나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다니엘과 에스더). 이러한 결단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무튼 그녀는 불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박차고 일어났다는 뜻이고, 불임으로 인해 주변의 괴롭힘을 떨치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녀가 이렇게 일어난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최초의 번역성경 70인 역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함이라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한나가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섰다.’ 5,6절에 한나의 불임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하시므로)이는 그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막으신분이 하나님이시니 열어주시는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난 것(바타콤)이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자리, 고통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나의 이런 바타콤 정신이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만든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그의 아들 사무엘은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이 된 것이다. 한나는 불임의 수치라는 고통과 절망에 묶여 무기력하지 않았고, 도리어 이것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이끄는 기회로 삼았다. 희망이 없다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으면 안 된다.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사실 희망이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 말고 달리 길이 없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곳이 희망이 회복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한나처럼, 다니엘과 에스더처럼 바타콤해야 한다. 문제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곳에서부터 희망은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길을 여는 주인공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원통(怨痛)을 형통(亨通)으로

한나는 원통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섰다. 그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다. 한나가 자신의 불임 문제를 해결한 또 하나의 방법이다. 그녀는 자신의 원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통곡하며 기도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 11절은 그녀가 통곡하며 드린 기도의 내용이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한나의 기도에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온다. 돌보다.’ 기억(생각)하다.’ 잊다.’는 동사다. 이 세 단어는 지금 한나가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나의 고통 중 가장 큰 것은 단순히 자식이 없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잊어버렸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자식이 없는 것은 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통곡하며 기도했다. ‘나를 돌보십시오.’ ‘나를 생각(기억)해 주십시오.’ ‘나를 잊지 마십시오.’ 그 결과 그녀는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이 된 사무엘을 얻게 되었고, 자신은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만든 사람이 되었다.

 

간이 절망스럽고 원통한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지 않은 것 같고,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신 것 같고, 나를 잊어버리신 것 같은 영적인 공허함,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두려움이다. 나에게는 상관없으신 것 같은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과 너무 멀어진 것 같은 영적 피곤함과 곤고함이다. 이것이 한나의 고통이었고, 이 때문에 한나는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통찰력이 있기를 바란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보는 눈, 그래서 그것을 위해 통곡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고통 중에 있는 나를 돌보시고, 하나님이 나의 당한 아픔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내가 받은 상처를 잊지 않으신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다 해결되고 다 치료되고 다 회복되는 것이다. 원통(怨痛)을 형통(亨通)으로, 원통(怨痛)을 영통(靈通)으로 바꾸는 것이 애통’(哀痛)이다. ‘평범특별로 바꾸는 힘이 기도다이를 온몸으로 잘 보여준 이가 한나이다.


 

희망을 이어가는 통로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통의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였다. ‘인간에 대한 증오, 경제적 궁핍, 창작활동에 대한 무력감,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상처를 받을 때 어떤 방법으로 이를 극복하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비법을 공개했다. 산책한다. 잠을 잔다. 참지 않고 그대로 분출해 버린다. 무시한다 등등.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내용이 독한 술을 마시거나 친구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이든의 경우는 특별했다. ‘우리 집에는 작은 골방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은 나의 기도실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조용히 그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골방에서 나올 때는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기도가 그의 고통을 처리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기도는 고통의 치료제이고 희망을 이어가는 통로다. 한나가 그랬고, 하이든이 그랬다.


 

본문에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나온다. 그것은 한나는 일어났는데, 당시 제사장 엘리는 앉아 있었다는 말씀이다(9). 그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께서 당대의 제사장과 그의 자녀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불임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시골뜨기 한 여인과 그의 아들을 사용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선 사람,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이런 사람이 소위 깨어있는영적인 창조적 소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시고, 또한 열어가신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 이런 교회를 찾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또한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고,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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