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소원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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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147회 작성일 24-06-09 13:39본문
주님의 소원을 기억합시다.
딤전2:4
2024. 6/9. 11:00(성령강림 넷째 주일)
생각이 중요하다.
같은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능력이 없어서 못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고, 돈이 없어도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그 일을 어떤 사람은 없어도 한다면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은 ‘생각’이다. 하고자 하는 생각, 해보려고 하는 생각, 해보겠다는 생각이다.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보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있으면 능력도, 시간도, 돈도 뛰어넘을 수가 있다. 현대그룹의 창업주 고(故) 정주영 씨가 못하겠다, 할 수 없다고 물러서면 ‘해봤냐!’고 다그쳤다는 일화도 같은 맥락이다. 해보지도 않고 ‘못한다.’는 생각부터 갖지 말고, ‘해보자.’,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생각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도 도모할 수가 있다.
그렇다. 무슨 일이든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히 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면 이미 절반은 이룬 것이다. 생각이 마음가짐을 결정하고, 마음가짐이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재능도, 능력도, 지식도, 기술도 아닌 ‘충성’(고전4:2)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충성은 곧 마음가짐이다. 즉, 마음의 태도다. 그러므로 충성스러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고, 충성스러운 마음가짐이 있으면 주님이 맡기신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충성이다. 주님은 일의 결과보다 그 일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중요하게 보신다. 또한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이런 사람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시101:8).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주님의 위대한 명령인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결국은 생각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이 생각이 전도에 대한 충성스러운 마음의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전도에 대한 주님의 마음
전도는 구호가 아니다. 전도는 생각이다.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 성경에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우선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양 백 마리를 돌보는 목자가 있었다(눅15:3~7). 이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고, 찾은 다음은 너무 기뻐서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즐거운 잔치를 베풀었다. 사실 숫자 100에서 1이란 무시할 수 있는 아주 적은 수다. 그런데 목자는 이 적은 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았다. 그것도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말이다. 이해하기 힘든 무모한 행동이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찾은 다음 많은 비용을 들여 잔치를 베푼 것이다. 그것은 잃은 양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목자다. 그런데 이 이상한 목자가 곧 주님이시다. 주님은 아무리 적은 것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으신다는 것이다, 찾으신 다음엔 큰 대가를 지불하는 잔치를 베풀어 기뻐하셨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전도가 왜 중요한지, 왜 그토록 주님께서 전도를 소중히 여기셨는지를 알게 하는 말씀이다.
또한 왕의 아들 혼인잔치 비유(눅14:15~24)에서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고 하셨다. 강권하여 데려다가는 ‘팔을 비틀어서라도 데려오라.’는 뜻이다. 형사가 범죄자를 힘으로 제압하여 손에 수갑을 채우고 끌고 가는 모습과 같다. 전도가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지를 강조한 표현이다. 이것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다. 이 외에도 수중에 있는 아홉 개의 동전보다 잃어버린 하나의 동전을 찾을 때까지 찾으셨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아들보다 마음에 대못질을 하고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셨다. 이것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 데서부터 전도가 시작이 된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
왜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이토록 마음을 쓰고 계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본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주님의 소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짤막한 말씀은 교회의 본질, 성도의 사명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곧 영혼을 ‘살려내는’일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다. 사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이기하다(요3:16). 그래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전도였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공생애 동안 주님의 관심은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막3:20).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도 전도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우리 주님의 최고 관심은 자나깨나 전도였다. 첫째도 전도, 둘째도 전도, 셋째도 전도였다. 그러니까 공생애 첫 말씀도 전도, 생애 전체도 전도, 마지막 말씀도 전도였던 것이다. 전도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며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육신의 생명도 그러한데 하물며 영원한 영적 생명은 말이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도 전도를 위해서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 제자를 부르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9). 그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가 세워진 것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지상명령에 나온 대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 일을 재생산하기 위함이다. 교회의 사역은 전도해서 제자를 삼고,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해서 전도자로 다시 세상에 보내는 일이다. 이것의 반복이 교회의 사역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복음전도 사역이 왕성할 때 교회는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되었지만 반면에 교회 안에 여러 문제가 생기고, 교회가 영적인 힘을 잃게 된 것은 복음전도를 소홀히 할 때였다. 그 좋은 본보기가 유럽교회다. 방식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으나 유럽교회가 복음전도에 열심일 때 큰 부흥과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전도를 멈추자 유럽교회는 힘을 잃고, 이제는 관광객이나 찾는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많은 선교사를 온 세상으로 파송하던 그곳이 이젠 선교대상지가 되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조선이다. 성도는 관광객이 아니라 구조대원이다.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성도가 교회를 유람선으로, 자신을 관광객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도설교를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여긴다고 한다. 아무튼 전도는 아무리 부담스럽고 불편해도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명이다. 우리 주님의 꿈이자 소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이러한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려야 한다. 오늘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강림 네 번째 주일인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목적도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자!
사람들은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 때 비로소 철이 들었다, 혹은 철이 났다고 말한다. 철이 든 성도 역시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다. 주님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지,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 소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철이 난 성도다. 그렇다면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좋아하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주님의 소원이 무엇일까?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다. 그렇다. 전도가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최대 소원이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철든 성도의 모습이다.
행동심리학에서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였는데,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소원’이 있었다. 소원이 작은 사람은 그 작은 만큼의 삶을 살고, 소원이 큰 사람은 큰 만큼 영향을 미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원이 없이 산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삶에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것이다. 심지어 소원이 큰 사람은 질병에 걸려도 빨리 나았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소원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가 있다. 세상에서 주님의 소원만큼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성도는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주님의 소원을 품은 사람이다. 그러니 성도가 잘 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은 주님의 소원을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전도생각을 품고 사는 것, 어떻게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릴 수 있을까 자나깨나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금주 한 주간도 주님의 소원인 전도, 그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한 전도생각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실천으로 매일 전도찬양을 10번 이상 듣고 따라 부르기를 실천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zRGqWhnSyUY 829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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