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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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950회 작성일 24-05-12 12:55본문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마8:18~22
2024. 5/12. 11:00
주님의 불편한 요구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말씀이 종종 있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예수님 당시 열두 제자 가운데 들지는 못했지만 주님께 관심을 갖고 따르던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먼저 가서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주님께 요청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 그러자 주님은 단호하게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 이 말씀은, 주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만 하기를 원하시고,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인가? 신앙생활과 부모공경은 병행하거나 조화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불편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런 반발심도 일으킬 수 있다. 어떻게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모른 체 하라고 하실 수 있는가? 과연 이것이 주님 말씀의 진의일까?
당시 유대인에게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최고의 선행으로 간주되었다. 후기 유대교에 와서는, 모든 종교적 의무에 우선하는 일이 되었다. 심지어는 아직 장사지내지 못한 시신 앞에선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쉐마’명령(신6:4~9)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였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하물며 자기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은 유대사회에서는 엄격한 의무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레21:1~3). 시신을 만지는 것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일이지만 가족의 시신은 예외라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성결해야 할 제사장도 부모나 가족의 경우에는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보다 깊게 재해석해서 가르치시기는 했지만 율법을 한 점도 폐기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완성하려 하셨다. 그러니 유대인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부모의 장례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사건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우선, 이 사람의 요청이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 여기서 ‘장사’(단순과거형)와 ‘~하게 하다.’(단순과거 명령형)는 단어의 시제가 모두 ‘단순과거형’이다. 과거에 일회적으로 발생한 일을 말할 때 단순과거형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부친은 이미 죽었고, 유대인은 당일에 장사를 치르는데, 죽은 부친의 시신을 그대로 두고 주님을 찾아와서 이런 요청을 한 것이다. 그냥 장사를 치르면 될 일인데 시신을 두고 주님을 찾아와서 이런 요청을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실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는 이 사람의 요청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 윤리적, 율법적인 문제를 떠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장사하는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런 문제의 발언을 듣고도 주변 사람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장례를 소중히 여기는 유대인 입장에서 부친의 시신을 두고 와서 장례를 허락해달라는 이 사람이나 그 요청에 답을 하신 주님이나 당연히 공분을 살 일이다. 당장에 돌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주변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일까? 주님 주변엔 주님을 옹호하며 따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지않게 공격하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발언은 그들에게 충분한 빌미가 되었다. 윤리적으로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십계명 제5계명을 범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에라도 주님을 공격했어야 하는데, 누구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안했다. 이 말은 주님의 이 발언을 누구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 미루어 이 사건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와 주님 당시(주후 1세기)가 다르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유추를 할 수가 있다. 주님 당시 유대인의 장례문화를 알면 더욱 분명해 진다.
유대인의 장례문화
유대인은 임종의 순간에 임종자의 방을 떠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면 그의 방을 떠나지 않고 임종을 지켜봄으로 그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또한 고인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가 숨을 거둔 후 무덤에 묻히기까지 절대 시신을 홀로 방치하지 않고 계속 곁을 지키며 시편을 낭송한다. 그리고 죽으면 즉시 시신을 무덤으로 옮겨 세마포로 싼 후 가족무덤에 안장했다. 가족무덤에 안장한 다음 죽은 자를 기억(이즈코르, יזכר)하면서 일주일을 애도 중에 보낸다. 애도기간이 끝낸다고 장례가 끝난 것은 아니다. 상을 당한 가족은 한 달간 공적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 중요한 명절이 있어도 회당이나 성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1년이 되는 날 다시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 모두 썩고 남은 뼈를 돌로 만든 석골함(Ossuary)에 담는다. 특히 그들은 육체가 뼈로부터 부패되어가는 것을 죽은 자의 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기에 장례의 마지막 단계인 뼈를 석골함에 담는 의식(ossilegium)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것에서 뼈를 석골함에 담는 것까지 마쳐야 장례가 끝난 것이다. 그래서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 것을 1차 장례라 하고, 유골을 석골함에 담는 것을 2차 장례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요청은 부친의 1차 장례를 치렀지만 2차 장례까지 마친 다음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은 나머지 절차는 남은 가족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사실 주님은 이 사람의 요청을 사명자의 자세에 대한 말씀으로 승화시켜 대답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의 개인적 요청을 일반화하여 대답을 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여기서 주님은 죽은 자를 ‘단수’가 아니라 ‘복수’(즉, ‘죽은 자들을’)로 사용하신 것이 그 증거다. 이 사람의 죽은 부친이 아니라 모든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님은 그의 요청에 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다른 교훈 즉, 제자의 도(주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실제로 본문은 부모의 장례문제에 대한 윤리적이고 율법의 계명을 다룬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강조한 내용이다. 즉, 주님을 따르는 길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강조한 내용이다.
본문에서 한 사람은 서기관으로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20). 나를 따르겠다면 이런 생활을 함께 할 용의가 있냐? 네가 가진 모든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이런 생활을 할 결단이 되어있냐는 질문이다. 반면에 부친의 장례를 핑계로 주님 따르기를 미루는 사람에게는 신속하고 강력한 결단을 촉구하셨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된 본문의 내용이 나온 것이다. 본문과 비슷한 내용이 눅9장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사례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다. 이 사람은 당장 따르겠지만 잠시 집에 들러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쟁기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쟁기질은 앞만 바라봐도 쉽지 않다. 그런데 쟁기질을 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면 제대로 쟁기질을 할 수가 없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본 것이었다. 가나안을 향해 앞만 보고 가야했는데,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하고, 거기서 먹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면서 모세에게 대들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이 그렇게 뒤돌아보다가 낙오됐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집중해야 하고, 지체하거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인생의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물론 그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핑계를 대며 주님께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부친 장례나 가족에게 작별인사도 안 되냐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을 따르는 일지만 사람 도리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과감히 버리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따지다보면 끝이 없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그 무엇보다 긴박한 것이고, 집중력을 빼앗기면 안 되는 소중하고 절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따름은 단절이고 포기다. 그리고 순종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그래서 따르지 못하고 핑계를 찾고 조건을 단다. 이런 문제도 있고, 저런 문제도 있고 하면서 말이다. 따름은 그래서 동행이라는 말보다 훨씬 급진적인 표현이다. 아무튼 무엇보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자. 뒤를 돌아보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거기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 붓는 성도,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신실한 제자가 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IHGexD0iRY 90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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