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 펴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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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680회 작성일 23-11-26 12:25본문
쭉 펴고 살자!
눅13:10~17
2023. 11/26. 11:00(성령강림 마지막 주일)
희망이 없이 사는 여인
다니엘 기도회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 시간이 ‘사랑의 헌금’ 시간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풍요롭고 발전되고 화려한데 여전히 질병이라는 그늘, 장애라는 그늘, 가난이라는 그늘에 앉아 신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간증자로 나선 강사 대부분도 평범하지 않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선 사람들이었다. 본문에도 비슷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한 여인인데,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11) 사람이다. 18년이란 시간이 말해주듯 그녀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웠을지 잘 보여준다. 현대 의학적으로 악성척추염을 오래 앓아 그리된 것 같다.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심하게 ‘꼬부라진’이 여인은 ‘땅만 보고’ 걷고, 그야말로 남들이 ‘내려다’보는 ‘아래 것’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름 대신 ‘꼽추’로 불리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변방’으로 밀려나 살아야만 했다. 누구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지만, 어쩌다가 눈에 뜨이면 이런 말이 전부였다. ‘아이고, 불쌍해라.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저 모양일까!’ 동정의 말이지만 그녀에게는 정죄와 저주였다. 이것이 소위 있는 사람, 곧 건강하고 잘 난 사람의 독선이고 위선이다.
18년은 참 긴 세월이다. 사실 며칠만 아파도 삶의 리듬이 깨지는 법인데, 그 긴 세월을 이 여인은 어떻게 견뎠을까? 천형처럼 다가온 질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안됐다고, 잘 될 거라고 위로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를 외면했다. 삶의 울타리인 가족조차 그녀를 짐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병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외로움이다. 그녀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차라리 없으면 좋을 잉여존재였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눌려 이렇게 된 그녀는, 그로 인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고, ‘사람다운 삶’을 누리지 못했다. 긴 세월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인간이하의 인간으로 ‘억눌려’ 살았다. 하여간 이런 저런 ‘악한 것’에 눌려,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신분을 잃고 ‘꼬부라져’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이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회복의 통로
이런 상황에서도 이 여인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회당‘예배’다. 누구도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서 말씀을 듣는 것이 그녀에게는 일종의 숨쉬기와 같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회당을 찾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녀가 주님을 알았다면 안식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찾아갔을 것이고, 자신의 형편을 말하며 고쳐달라고 간구했을 것이다. 본문에는 이러한 그녀의 태도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아무튼 그 운명의 날,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눈에 발견되어 포기하고 살았던 그녀의 삶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다. 미국으로 집회를 갔을 때, 교제시간에 어느 집사님이 한 이야기라고 한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복권에 당첨이 되게 해달고 작정을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놈아, 복권을 사놓고 당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래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렇다. 복의 통로를 열어놓고 복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주로 복의 통로를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의 통로가 무엇인가? 소위 성도의 의무라고 하는 주일성수, 헌금생활, 전도생활, 봉사생활이 그것이다. 특히 주일성수, 곧 ‘예배생활’이 중요한 복의 통로다. 예배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주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다. 본문에서 희망 없이 살았던 여인이 회복의 복을 누리게 된 것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을 통해 긴 세월 그녀를 붙잡고 있던 병마로부터 놓임을 받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정말 주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예배의 자리를 사수하기 바란다.
아름다운 주님의 마음
당시 유대교 회당의 구조는 강단 바로 앞쪽에 유대 성인 남자자리, 그리고 그 뒤편에 여자와 아이자리가 있다. 이 여인은 뒤 자리에 엎드리다시피 바닥에 앉아서 힘겹게 고개를 들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주님과 마주치게 되었고,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의 자리를 지나 감히 강단 앞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변두리’로 내몰린 인생이 ‘공동체’ 중앙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2,13).
이 짧은 구절에 주님의 행동이 네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보는 것’이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녀를 주님께서 보신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보셨다. 이렇게 ‘없는’ 존재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그녀를 주님께서 눈여겨보신 것이다. 둘째는, ‘부르신 것’이다. 이는 큰 소리로 불러내신 것을 뜻한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공적 장소에서 자기 아내일지라도 남자가 여자를 자기 곁으로 부른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녀를 앞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여기에는 변두리로 내몰린 인생을 공동체의 중심으로 세우셨다는 의미도 있다. 셋째는, ‘선포하신 것’이다.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이는 그녀가 지난 18년 동안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다. 이 한 마디를 듣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그런데 그 말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수하신 것’이다. 그녀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주신 것이다. 특히 사랑의 손으로 아픈 곳을 만져주신 것이다. 그랬더니 꼬부라진 그녀의 몸이 쭉 펴졌다. 이렇게 보고, 가까이 부르고, 선포하고, 접촉하는 일련의 행동은 이 여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압축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여인을 회복시킨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녀가 이런 은혜와 복을 받은 것은 그 불편하고 불우한 상황에도 예배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예배의 자리는 주님의 시선이 집중이 되는 곳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고, 주님의 복이 선포되는 곳이고,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의 꼬부라진 사람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허리를 펼 수 있게 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렸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이의 찬송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라 해서 다 기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노를 터뜨린 사람도 있다. 본문의 회당장이 그런 사람이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14).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분을 내었다. 주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보다 안식일의 규정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정말 꽉 막힌 사람이다. ‘본’(本)과 ‘말’(末)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규정과 규칙에 매여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지 못한 사람이다. 안식일의 존재이유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을 통해 사람이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리듬 속에 몸을 맡기는 날이다. 그 리듬 속에 머물면 사람은 회복이 된다. 안식일은 생명이 회복되는 날이다. 허리를 편 이 여인은 주님을 통해 진짜 안식일을 경험한 것이다. 반면에 마치 자기 권위가 훼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고, 회중에게 일장 연설을 한 회당장이야말로 진짜 마음이 ‘꼬부라진’ 환자다. 규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일이 반복될 때 공감능력은 퇴화되기 마련이다. 마음이 꼬부라지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기뻐하는 일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몸이 꼬부라진 것도 문제지만 마음이 꼬부라진 것이 더 큰 문제다.
쭉 펴지는 인생
우리 주변에도 꼬부라진 사람이 많다. 이 여인이나 회당장이처럼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꼬부라진 시각(관점), 꼬부라진 가치관, 생각, 행동, 귀와 혀 등을 가진 사람이 많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도 사실 꼬부라진 사람이다. 그래서 사물이나 사건을 바로 보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고 항상 비뚤어지게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듣거나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항상 비뚤어지게 듣고, 말하기가 일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꼬부라진 것일까? 본문의 여인이 귀신 들리고, 회당장이 율법의 정신에 상관없이 구정과 규칙에 매인 것처럼 무엇엔가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관습이나 사상, 종교적 신념을 비롯하여 건강하지 못한 습관과 약물 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세대를 불문하고 스마트폰에 사로잡힌 것도 우리의 삶을 꼬부라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이 되어 쭉 펴질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꼬부라진 여인이 회당예배를 찾듯이 주님께서 거하시고, 영광스런 주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자리를 사수하는 것이다. 예배를 소중히 여겨 어떤 상황에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시32:6~8). 그리하면 꼬부라진 것들 때문에 힘들고 지친 우리를 향한 우리 주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주님의 이 선포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그래서 쭉 펴지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knJNB66xa6E 237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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