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를 별에 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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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673회 작성일 23-10-15 14:00본문
수레를 별에 묶어라!
눅12:35~40
2023. 10/15. 11:00(성령강림 후 스무 번째 주일)
마지막을 생각하라!
코미디 영화「굿플레이스」(The Good Place)에서 나온 한 장면이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있기에’ 끝임없이 이어지는 천국생활이 축복이라기보다 오히려 ‘족쇄’처럼 느껴져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끝이 없는 삶이란 허망하고 재미없는 것이란 내용이 담긴 에피소드다. 우리의 삶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끝을 생각하며 살 때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말기간암으로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어느 집사님처럼 매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살게 되는 것이다.
‘모멘토 모리!’(Momento Mori)라는 문구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라틴어 문구다. 로마시대 개선장군은 황금왕관을 쓰고, 금수를 놓은 자줏빛 전통외투 타고(Toga)를 입고, 4마리 말이 끄는 전차 콰드리가(Quadriga)를 타고 개선문을 통과하는 시가행진을 했다. 환영 나온 시민의 찬사를 받으며 행진하는 장군을 향해 노예들을 시켜 뒤에서 ‘Momento Mori’를 외치도록 했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는 예외 없이 죽으니 겸손하라는 뜻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개선행사 예식의 한 순서로 진행이 된 것이지만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끝을 기억하지 않으면 교만하여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로 ‘죽음’이다. 나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도 죽는다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늦장과 연기다. 이들의 삶의 원칙은 체면이고 그 방식은 흉내이거나 변명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른 새벽에, 혹은 늦은 저녁에 자신의 언행을 뒤돌아본다. 그래서 자신이 흠모했던 하루를 살았다면 그 자신을 축하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꾸짖는다. 이들은 타인에게는 친절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무엇보다도 유수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아까워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늘 한탄한다.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으면
타락한 시대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마지막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동일하다. 초대교회 성도는 다시 오실 예수님과 역사의 마지막 때를 의식하며 살았다. 그래서 혹독한 박해의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어려운 이웃을 섬길 수가 있었고, 맞아죽을 각고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를 하며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다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들은 천국이 왔다고 믿었다. 콘스탄틴 대제를 메시야처럼 추앙했다. 이 때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걸작을 썼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고, 콘스탄틴 대제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핍박이 사라지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 교회는 마지막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것이 곧 중세를 타락한 시대, 영적 암흑시대로 만들었다.
삶도 신앙도 항상 끝을 생각하며, 더 이상 기회도 없고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할 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종말의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 종말론과 관련하여 몇 번의 사회적 물의가 있었고, 또한 대부분의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들이 종말론을 왜곡시켜 종말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종말의식이 희박해지고, 대신 현세에 집중하는 기복신앙에 물든 세속화에 침몰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하는 경건한 두려움, 거룩한 고민을 가진 영적 긴장이 사라지니 세상 사람과 똑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문은 이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띠를 띠고 등불을 켜 서 있으라!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이는 기다림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당시 유대지역에서 옷은 길고 통이 넓어서 여행이나 활동할 때 허리에 띠를 띠었다. 긴 외투의 허리 부분을 띠로 졸라매는 것은 어떤 활동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준비와 봉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왕상18:46, 왕하4:29).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12:11). 특이한 것은 주님께서 마지막 때의 사건을 이야기하실 때 유월절 때와 같은 긴급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외출한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종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듯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기에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지혜이고 또한 자세다. 이렇게 주님의 재림을 깨어서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 48절까지인데, 본문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고, 41절에서 48절까지는 그 방법을 주로 말씀하고 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의 재림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본문이 주님의 재림을 지인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출타한 주인에 비유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한 출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전재가 되어 있다. 이 만큼 분명한 것이 주님의 재림이라는 것을 본문이 강조하고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본문뿐만 아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초림은 456번이나 직간접적으로 예언되어 있다. 반면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역사를 마무리 한다는 약속은 1,518번이나 나온다. 재림에 대한 약속이 초림보다 3배나 더 많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초림에 관한 이와 같은 예언이 온전히 이뤄졌기에 다시 오신다는 예언 역시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주님의 재림지연을 두고 주님의 재림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어왔던 주장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점을 일축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재림의 지연은 포기가 아니라 참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참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 시기를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초림이 그랬던 것처럼 재림 또한 언제인지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아들도 천사도 모른다고 했다. 이를 실감나도록 본문은 도둑에 비유를 하고 있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39). 살면서 왜 도둑을 맞을까? 두 가지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른 것과 이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은 것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도 그렇다는 것이다. 주님의 초림도 그랬지만 이렇게 재림에 대한 시기를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항상 깨어서 준비하며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본문의 강조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의 재림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지만 그 시기를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서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시리라 하시니라.’(40).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이 있기 때문이다(37). 주인이 집에 돌아왔을 때 깨어 있는 종들은 복이 있을 것이라.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복이다. 사실 이 말씀(37)은 상식적이지 않다. 생각을 해보라! 주인을 기다렸다가 맞이한 것은 종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인데 이 일에 주인이 종들에게 사례를 한다는 것, 그것도 밤중에 와서 종들을 위해 상을 차리고 시중을 든다는 것은 더욱 어색하다. 특이하지만 주인이 깨어 기다린 종을 시중드는 것은 종을 주인의 위치로 상승시키는 것이다. 주인이 종을 시중드는 것은 일반적인 질서를 역행하는 것이기에 ‘뒤집기’ 은혜다. 뒤집기 은혜의 대표는 성탄의 은총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무한한 존재가 유한의 속에 오는 것은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이런 은혜가 주님의 재림 때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고된 하루를 보내고도 주인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종들에게 사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힘들고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준비하고 깨어있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직접 주님이 시중을 들어주고 섬겨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감격스럽다. 우리 모두는 이런 날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누리게 될 복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항상 준비하고 깨어서 기다려야 할 이유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7a).
수레를 별에 묶어라!
만능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수레를 별에 묶어라!’ 우리의 인생이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수레라면 인생이란 수레를 단단히 묶을 별은 소망이다. 소망을 품고 살아야 고단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수레를 단단히 묶을 소망의 별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다. 특히 주님의 ‘재림’이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수레를 주님의 재림이라는 소망의 별에 단단히 묶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깨어서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이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수레를 주님의 재림이라는 소망의 별에 단단히 묶고 하루하루 힘 있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의 재림은 분명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우리에겐 축복과 환희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재림의 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됩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NAPE1Lw_Fqo 3133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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