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절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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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124회 작성일 19-07-12 11:09본문
맥추절을 지키라!
신16:9~12
2019. 7/7. 11:00
세 가지 소원
프랑스 어느 바닷가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내는 착하고 남편은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어느 날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멋진 마차에서 귀족 여인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귀족 여인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과 멋진 마차에 이 부부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우리도 귀족이 되어 저런 마차를 가졌으면......’ 이런 생각을 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식탁에 천사가 앉아 있었다. 이들이 말할 새도 없이 천사가 말했다. ‘소원을 세 가지만 말하세요. 무엇이든 들어줄게요.’ 그리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부부는 신이 나서 무엇을 달라고 할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좀처럼 의견이 일치되지 없었다. 아내가 말하면 남편이 반대를 하고, 남편이 말하면 아내가 시큰둥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저녁이 되었고, 저녁을 먹고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수프를 끓이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수프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커다란 소시지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그러자 한 발 쯤 되는 커다란 소시지가 식탁 위에 턱 놓였다. 소시지로 소원 하나를 사용해버린 아내에게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 소시지가 당신 코에나 붙어버려라!’ 이번에는 그 큰 소시지가 아내의 코에 달라붙어버렸다.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부부는 모기 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코에서 소시지를 떼어주세요.’ 이렇게 해서 이 부부는 세 가지 소원을 다 사용해버렸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 이야기가 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삶, 자기 것에 만족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리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준비의 중요성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회가 온 줄도 모르게 된다. 성경을 보면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님의 비유가 나온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뜻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는데 한 여자는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자는 버려둠을 당하리라는 것이다(마24:40,41). 두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이다. 데려감을 당한 사람과 버려둠을 당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준비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이다. 소원도 마찬가지다. 위 이야기처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까 그 소중한 기회를 쓸데없이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유일한 소원, 성령충만
어느 기자가 고(故) 하용조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자녀에 대한 목사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하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딱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충만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큰 도전을 받았다. 만약 나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네, 아들 한이가 속히 든든한 직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 교회를 출석할 수 있는 지역에서요.’ 하 목사님과의 수준차이를 느낀다. 우선순위에 대한 말을 늘 하면서도 현실에 매몰이 되어 본질을 보지 못하기에 이런 참사가 발생한 것 같다. 사실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이와 같은 소원의 차이가 신앙의 차이, 기도의 차이, 영성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 자녀의 성령충만을 소원하는 사람과 자녀의 진로를 소원하는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리고 누구의 삶이 더 잘 되고 형통하겠는가? 그래서 나도 지금은 한이와 하경이를 위한 소원을 바꿨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여러분 또한 소원이 성령으로 충만함이 되기를 바란다.
살면서 많은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하나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이러저러한 소원을 말하고, 많은 필요를 드러내지만 이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함 때문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면,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는 형통한 삶을 살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모든 필요 또한 채워지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울처럼 자족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된다. 복음서에 나온 주님의 제자들이 좋은 본보기다. 솔직히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위인들이었다. 도대체 주님은 이런 사람들로 무엇을 하시겠다고 제자로 부르신 것일까? 주님까지 답답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그 한심하고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고, 세상을 의미있게 변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충만이 그 비결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삶은 왜 성령충만이 중요한지, 왜 성령충만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이렇게 중요한 성령충만의 방법으로 순종과 모이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이 시간에는 그 세 번째 방법으로 감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맥추감사절에 임하신 성령
2019년도 전반기를 보내고 후반기를 시작하는 첫 주일인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맥추절에 대한 이름이 여러 가지다. 유월절이 지나 안식일 후 첫날은 보리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다. 그래서 이 날을 초실절이라고 하는데, 이 초실절에서 시작하여 안식일이 7번 지난 후 그 다음 날 50일째를 칠칠절이라 부른다. 안식일이 7번 지나갔다하여 그렇게 부르고, 혹은 열(10)을 뜻하는 순(旬)이 초실절에서 5개째라 하여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하고, 그때가 보리를 거둘 때라 맥추절이라고도 한다(출23:16). 바벨론 제국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한 뒤(주전 587년)에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은 날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이 맥추절에 성령이 임하셨고(행2:1~4), 이와 함께 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맥추절을 성령감림주일, 혹은 교회의 생일주일로 지켜오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감사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령충만의 방법으로 감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엡5:18~2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살펴보면 1개의 주동사(‘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 이 동사를 수식해주는 5개의 보조동사(‘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복종하라.’)가 나온다. 물론 5개의 보조동사(모두 현재분사임)를 성령충만의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생활이 지속적으로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활을 항상 힘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도 사실이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인 감사생활(여기서 ‘감사하며’가 현재분사임)은 성령충만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성령충만의 방법이다. 그래서 맥추(감사)절에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것이다. 장막절(추수감사절)도 성령님과 관련이 깊다. “명절(장막절) 끝날 곧 큰 날(호산나 라바)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이 성령을 두고 하신 것이라고 했다(요7:39). 두 감사절(맥추와 추수)이 모두 성령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감사는 복을 부르는 나팔이다.
감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감사는 섬기는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반응이고, 또한 신앙성숙의 척도다. 감사는 천국방언이다. 평화로운 천국에 딱 한 가지 다툼이 있는데, 그것은 ‘감사다툼’이라고 한다. 그 만큼 감사는 천국을 누리고 살아가는 방법이란 뜻이다. 감사는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다. 감사를 표현할수록 나는 겸손하게 낮아지고, 듣는 상대방은 드러나고 높아진다. 왜냐하면 감사는 상대방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의 호의를 기억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그토록 감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할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고 영광을 받으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장로교 신조 1조에서는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라고 말한다.
제사로 예배를 드리던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예물보다 감사를 요구하셨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시50:13,14). 예배의 조건이 제물이 아니라 감사라는 것이다. 예배의 자세도 감사라고 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사는 제물의 양이나 제사의 횟수가 아니라 감사라는 것이다. 기도도 감사함으로 드리라고 말씀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이 뿐만 아니다. 감사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살전5:18). 감사가 있는 곳, 감사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감사가 주님의 더 큰 복을 부르는 나팔이라는 것이다. 10명의 나환자가 모두 주님께 고침을 받았는데,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눅17:11~19). 주님은 감사한 그 사람에게 영혼의 구원을 선포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감사한 이 사람은 나병은 물론 영혼까지 구원을 받았다.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받은 것도 큰 복이지만 영혼구원은 더 큰 복, 최상의 복이다. 감사가 그에게 이런 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 복 중에 복 최고의 복, 선물 중에 선물 최상의 선물은 성령이다.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흘러넘치게 하는 비결, 이 성령님의 지배 안에 사는 비결이 감사다. 이 감사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기며 감사로 물든 삶이 되도록 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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