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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자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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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480회 작성일 19-07-3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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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자 하여

10:44~48

21019. 7/28. 11:00

중립적인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척 이성적이고 공평해서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심지가 견고해서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한다.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개인 차이는 있겠으나)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중립적인 사람은 없다. 인간을 관계적 동물이니 혹은 사회적 동물이니 하는 표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란 의미다. 심지어 사람은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을 유연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 알고 있다시피 인간의 문명이나 문화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발 빠르게 대처하는 유연성의 결과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에서도 삼류(三流)인 로마인이 대제국의 주인공인 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로 이 유연성을 꼽았다. 그들은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보충하여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들이 도로를 건설하는데 열을 올린 이유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어리석은 지도자는 적의 침략을 늦추겠다고 다리를 끊어 자기 백성을 수장시켰는데, 그들은 주변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위해 주변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열심히 도로를 만들었다. 주변 환경에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자기를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환경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 환경을 극복하여 탁월하게 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환경에 매몰되어 낙오자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먹는 것이 중요하다.

비만과 고혈압과 당뇨를 현대병, 혹은 풍요병(Affluenza)이라고 부른다. 이는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먹거리와 관련이 깊다. 현대인이 활동량에 비해 너무 기름진 것을 많이 먹다보니 이런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심지어 풀뿌리 나무껍질도 먹었지만 먹거리가 풍성한 현대는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옛 사람이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 별 것을 다 고민한다고 웃을 일이나 현대인에게는 현실적인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먹는 문제는 영적 생활에서도 중요하다. 육적인 생명이 무언가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영적인 생명도 먹어야 살 수 있다(4:4). 특히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생명이 자라고 생명이 풍성해 진다. 여기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읽고 듣고 보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먹으면 영적 파산에 이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담과 하와다. 최초의 인간인지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후 얼마나 살들이 돌보셨는지 모른다. 에덴이라는 결핍이 전혀 없는 행복동산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그곳에서 누리도록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단의 화신이었던 뱀의 말을 먹어 급기야 에덴에서 쫓겨나는 영적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에 아담의 10대 후손 노아는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하나님의 홍수심판에서도 자신과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아주 먼 훗날, 유다말기에 선지자로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20세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자신은 너무 어려서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먹여주어 그 일을 잘 감당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먹은 사람은 위기에서 구원을 받고, 영적 거인이 되고, 맡겨진 사명을 성공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다.

 

 

성령충만의 또 하나의 비결

본문도 말씀을 사모하여 먹은 사람의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고넬료라는 로마사람인데,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의 질서유지를 위해 파견된 100명의 로마병사를 지휘한 지휘관이다. 유대는 로마관리들이 무척 꺼리는 지역이었다. 독특한 종교문화 때문에 갈등이 잦았고, 소요도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고넬료는 유대교로 개종을 했고, 경건한 유대인 못지않게 주변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경건생활에 힘썼다(그들의 경건생활의 기준은 기도와 구제). 그는 기도하던 중에 주께서 보내신 천사의 방문을 경험하였고, 천사로부터 인근도시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그에게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급히 수하의 병졸을 그곳으로 보내 베드로를 모셔오게 했고,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부어지는 역사를 경험하였다(44,45).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경험했던 성령충만사건(2:)에 이은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성령충만사건(10:)이라고 부른다. 두 사건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유대인과 유대인 가정에서 일어났고, 후자는 이방인과 이방인 가정에서 일어났다. 전자는 함께 모여서 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할 때 일어났고, 후자는 함께 모여서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났다. 이는 말씀을 듣는 것이 성령충만의 또 하나의 방법인 것을 보여준다.

 

 

성령과 말씀의 관계를 알면, 말씀을 듣는 것이 성령충만의 비결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한다. 진리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더 나아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다. 또한 성령을 성경의 진짜 저자라고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로 진리를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또한 따르게 하신다. 순종하며 살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진리의 영이고, 진짜 성경말씀의 저자라면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할 때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시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성령충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다면 왜 우리에겐 이런 일이 없는 것일까? 매일 새벽마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읽고 듣고 보고 공부하고 묵상하는데 말이다.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사는 것보다 거의 말씀과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데, 성령의 부어주심이 경험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다. 왜 그런 것일까?

 

 

듣는 태도가 중요하다.

앞에서 무엇을 먹느냐? 이것이 현대의 고민거리라고 했다. 어느 티비 건강 프로그램에서 이계호 교수가 나와 사람에게 독이 되는 식품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개한 식품이 현미였다. 현미가 좋다는 것은 상식인데, 현미가 독이 되는 식품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어서 그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현미가 좋은 식품인 것은 사실이나 잘못 먹으면 도리어 해가 된다고 했다. 그때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좋은 식품도 먹는 방법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을 먹느냐?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먹느냐?’(먹는 방법) 라고 했다.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도 어떤 사람에는 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득이 되는 것은 먹는 방법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말씀이 내게 능력으로, 특히 성령충만으로 나타나기 위해선 말씀을 먹()는 태도가 중요하다. 고넬료를 통하여 이 점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선, 고넬료는 사모하며 준비를 했다(2,24). 그의 꾸준한 기도생활이 그가 주님의 은혜를 얼마나 사모한 사람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기도 중에 천사의 방문을 받았고, 천사의 지시에 따라 베드로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그에게 사모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하나는 베드로를 초청해놓고 친척은 물론 친구들까지 다 불러 모아놓고 기다렸다(24). 혼자가 아니라 함께 듣고자 이렇게 준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사모하며 준비를 하여 말씀을 들었다. 다음은,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25,26). 그는 베드로가 들어서자 그의 발아래 엎드리어 절을 하며 맞이하였다(25). 이는 신적인 존재(천사와 같은)나 그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사람(황제나 사령관 등)을 만났을 때 취한 태도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반응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25). 여기서 이미 설교의 결과는 결정이 났다. 말씀을 증거할 사람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는데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어떻게 받겠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전의식이다(33).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다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했다. 베드로가 증거할 말씀이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말씀을 듣기 위해 베드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니까 주님 앞에 있는 것이다(사극에서 흔이 볼 수 있는 어명을 전달하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어명을 전달받는 광경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음). 바로 이 세 가지가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이 가진 말씀을 듣는 자세였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 듣는 그들과 그곳에 성령이 부어졌다(44,45).

 

 

말씀을 읽고 보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도 내게는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말씀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하자. 말씀을 듣고자 하는 고넬료의 태도와 나의 태도를 비교해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어느 자료에 보니 일본에서도 성경이 매년 150만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기독교 인구는 거의 이슬람권 수준이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을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에 대한 실증이다. 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태도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와 같은 태도로 말씀을 읽고 보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주인공이 됩시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바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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