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일약(二命一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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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771회 작성일 19-06-27 10:40본문
이명일약(二命一約)
행1:1~5
2019. 6/23. 11:00
화룡점정(畵龍點睛)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무슨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많이 사용한다. 용을 그리고 난 후,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그 용이 실제 용이 되어 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신화와 같은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곳이거나 마지막 손질을 해서 매듭을 잘 짓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화룡점정이 빠졌다고 하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겉으로 잘 포장되어 있더라도 핵심이 빠진 것이 된다.
이 고사의 주인공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다. 그는 우군장군 오흥태수를 지냈지만 화가로 더 유명했다. 붓만 들면 세상 모든 것을 마치 사진처럼 그렸다. 벼슬을 마친 뒤 그림을 그리며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안락사(安樂寺) 주지가 그에게 절의 벽에 용(龍)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붓을 들어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네 마리의 용을 그렸다. 꿈틀대는 몸통, 갑옷 같은 비늘, 날카로운 발톱, 정말 살아있는 용 같았다. 한데 이상하게도 용의 눈에 눈동자가 없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묻자 그가 답했다. ‘용에 눈을 그려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를 빨리 그려 넣으라고 재촉했다. 성화에 못 이긴 그가 용 한 마리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자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그 용이 벽에서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수형기「(水衡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앙의 화룡점정
신앙생활에도 우리의 신앙을 비상(飛上)하게 만들어주는 영적 화룡점정이 있다. 이미 이를 경험한 사람이나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알 것이다.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신앙을 더 높은, 더 깊은, 더 넓은 영적 세계로 나아가게 만든다. 사도행전을 보면 겁쟁이 사도들이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가서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우리와 우리 민족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고 담대히 외쳤다. 그들이 소심한 겁쟁이에서 담대한 복음 전파자로 바뀐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이 무식하다고 조롱을 받은 갈릴리 어부출신인 그들을 예루살렘 도성에서 최고로 주목을 받은 일약 대(大)스타로 대접을 받게 만들었다. 땔감으로조차 사용할 수 없는 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을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극상품 포도로 바꿔놓은 것이 성령충만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도우미(Helper)시다. 무엇보다도 길이시고 진리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도록(to know), 믿도록(tp believe), 예수님을 따라 행하도록(to do) 도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의 온전하심에까지 자라도록 도우시는 분, 주님을 믿는 성도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관여하시면서 우리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일으켜주시고, 붙잡아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용기, 시련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이 시간에는 이와 같은 성령님으로 충만함의 의미와 그 방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령충만의 의미
우선 헬라어로 ‘충만’이란 뜻을 가진 단어(πληρμα)의 뜻부터 생각해보겠다. 이 단어는 ‘플레로’(πληρω)라는 동사에서 왔다. 이는 성경에서 크게 네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내적으로 가득 채움’이란 뜻이다(온전, 혹은 완전의 의미). 둘째는 ‘외적으로 가득 채움’이란 뜻이다(행2:2). 셋째는 ‘때가 되다’는 뜻이다(행2:1). 그리고 넷째는 ‘마음이 점유된 상태’를 뜻한다. 마음이 지배를 당하거나 사로잡힌 상태를 뜻한다.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6). 우리 성경에 ‘심히 두려워하여’에서, ‘심히’가 원어로 ‘플레로’다. 이 단어를 우리 성경은 의역을 한 것인데, 이를 직역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혹은 ‘두려움에 압도(지배)되어’ 정도가 된다. 예를 들어, 기쁨이 가득하다. 감사가 가득하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마음이 감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충만도 마찬가지다. 성령으로 사로잡힌 삶, 성령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을 의미한다. 본문은 이와 같은 성령충만의 현상을 세례에 비유하고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온 몸이 물에 잠기듯 성령충만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와 같은 성령으로 충만함, 곧 성령에 사로잡혀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실까?
성령으로 충만은 순종의 사람이 받는 선물
본문에 그 답이 있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이후 40일 간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직전 감람산에서 500여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두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약속이다. 두 가지 명령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이명일약(二命一約)이라고 말을 만들었다. 행2장에서 오순절 성령충만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경험한 주인공이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이다.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500여 명이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500명 중에 120명의 사람들만 순종했다. 1/4만 순종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던 이 120명의 사람만 성령충만을 경험했다. 이미 말한 대로 성령충만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충만을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순종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중요한 비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순종인가?
그렇다면 왜 순종인가? 왜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선물로 주시는가? 사실 성경은 순종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순종이란 단어가 현대인에게 매우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다보니 이런 시류에 편승되어 성도조차 그 중요성을 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순종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꾸짖을 때 주신(삼상15:22) 말씀 정도로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이 순종으로 시작하여 순종으로 맺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에덴동산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동산을 누리는 조건으로 단 한 가지만 제시하셨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고, 헌신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이다. 순종이 에덴의 복을 누리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순종이라는 뜻이다. 왜 순종인가? 순종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고,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순종에는 이미 충성도 헌신도 희생도 모두 전제되어 있다. 때문에 순종을 유일한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복 중에 복이고, 선물 중에 선물인 성령을 순종의 사람에게 주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이신 우리 예수님이 오셨다. 우리 주님의 삶은 탄생에서 죽으심까지를 순종이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아담과 주님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주님을 통해 잃어버린 복, 잃어버린 낙원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비결은 역시 순종이다. 순종이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조건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22:17). 그러니까 성경의 처음도 순종이고, 마지막도 순종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소원의 처음도 순종이고, 마지막도 순종이다. 성경은 헤아릴 수 없는 복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과는 무관하고, 성경은 능력있는 풍성한 삶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항상 무기력하고 옹색(壅塞)하다. 그 이유는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복과 능력을 작동시키는 유일한 조건인 순종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함도 마찬가지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더욱 능력 있게, 더욱 풍성하게, 더욱 형통하게 우리 삶을 만들어준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의 힘과 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주님의 영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슥4:6).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우리의 삶이 더욱 능력 있고, 더욱 풍성하고, 더욱 형통하도록 순종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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