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삶Ⅶ,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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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708회 작성일 17-12-24 13:07본문
확신의 삶Ⅶ, ‘승리’
민13:30~14:3
2017. 12/24. 11:00
알렉산더와 동전
알렉산더는 10배나 더 많은 적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병사들 역시 적의 수에 압도되어 겁을 먹고 있었다. 이대로 전쟁을 했다간 질게 뻔했다. 그렇다고 적 앞에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어려움이 처한 알렉산더는 병사들을 두고 인근에 있는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신께 기도 했더니 신께서 내게 계시를 주셨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싸울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퇴각한다. 자, 동전을 던져서 신의 계시대로 결정하자!’
그리고 알렉산더가 동전을 높이 던졌다. 어느 면이 나왔을까? 물론 앞면이 나왔다. 그러자 병사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일제히 환호를 지르면서 전장으로 나가 용감히 싸웠다. 그래서 10배나 더 많은 적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뒀다. 전쟁 후에 한 장수가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신의 계시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정말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알렉산더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던지든 동전은 앞면만 나오게 되어있었네. 동전 뒷면은 없었으니까. 내가 동전 앞면만 만들어서 던진 거야! 병사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고 잠시 속임수를 쓴 것이네.’
그렇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적의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병사들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승리할 수는 있는 확률도 커진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확신이 중요한다. 확신이 있으면 실수나 실패를 현저하게 줄일 수가 있다. 아라비아 속담이다.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잠자고 있는 사람이니 그를 깨워라.’ 나는 이와 같은 성도가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확신의 삶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사람이 많고, 죄 사함을 받고도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고, 주님이 동행중에 계시고, 꾸준히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을 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확신의 삶 시리즈 설교를 준비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승리의 확신’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영적 메뚜기 의식
선지자 엘리사 때 일이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보니 아람 군사가 엘리사를 잡겠다고 엘리사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기겁한 그가 엘리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엘리사는 우리와 함께 한 자가 많으니 두려워말라고 하면서 사환의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때 그의 눈이 열렸고, 그는 아람 군사를 포위하고 있는 또 다른 군사를 보게 되었다. 엘리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보낸 하늘의 군사였다. 하늘의 군사를 보고나니까 아람 군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엘리사의 사환처럼 누구라도 배후에서 돕고 있는 손길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버티고 있는 문제만 보고, 위협하는 적만 보면 놀라서 낙담할 수밖에 없다. 본문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거의 1년 만에 가나안의 접경지역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그들이 새삼스럽게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먼저 알아보고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무턱대고 들어가지 말고 알아보고 가자! 얼마나 합리적이고 좋은 생각인가? 하지만 이것이 시험이다. 마태복음 2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인도가 멈추게 되고,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내용생략). 본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명을 선발해서 가나안 땅을 탐지하도록 했다. 그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알아보고 돌아왔는데, 가나안 땅에 대한 그들의 보고는 긍정적이었다. 두 사람이 작대기에 꿰어 메고 온 포도송이를 비롯하여 여러 과일을 보여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라고 했다(13:27). 하지만 들어가서 취하자는 데는 둘로 갈렸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이었고, 나머지는 부정적이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차려놓은 밥상이니 당장 들어가서 취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달랐다. 그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13:32)이라고 악평하면서 자신들은 그 땅 거주민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13:33). 이와 같은 영적 메뚜기 의식, 곧 패배의식은 온 백성에게 전염이 되었다. 급기야 백성은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죽이려고 하는가?’(14:3)고 원망하며,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울부짖었다. 그래서 결국 애굽에서 태어났던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해야 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사건이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오합지졸 패잔병에게 겁먹고 주저앉아 이렇게 된 것이다(14:9). 승리를 보장해 놓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이렇게 하찮은 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바라봄의 법칙
결국 인생의 문제 ‘바라봄’의 문제다. 바라봄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진다. 언어가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평가가 달라진다. 열 두 명의 정탐꾼이 같은 기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성읍과 같은 사람을 보고 왔지만 전혀 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바라봄의 차이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통하여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14:8,9). 때문에 비록 가나안 땅의 거주민이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컸지만’(13:28)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차려놓으신 밥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14:8).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은 지휘관을 잃은 패잔병, 보호자를 잃은 미아이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를 확신하며 당장 들어가서 취하자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열 명은 문제만 보았다. 크고 견고한 성읍만 보고, 키가 장대한 사람만 보았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악평하고, 영적 메뚜기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들어가지 말자, 절대 상대할 수 없다,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13:31).
이것이 마귀의 계략이다.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하고, 패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신이 날 정도로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다.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어떻게 이와 같은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라봄에 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를 여기까지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또한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로 하여금 이기고 또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주님에 대한 이런 확신을 가질 때 우리 자신이 신이 날 정도로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인 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 세상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 경험이나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적도 내 힘과 내 경험과 내 지식으로 물리칠 수 없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주님께서 공급하신 능력으로 이길 수가 있다. 그래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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