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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열매Ⅶ,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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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153회 작성일 17-10-2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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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열매, ‘거짓

3:13~18, 5:1~11

2017. 10/22. 11:00

정직이 뉴스거리가 된 시대

미국 시카고 데일리라는 뉴스지에 난 기사라고 한다. 일리노이주()에 어글스피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 이야기다. 그는 손님이 맡긴 세탁물의 주머니에서 2만 불을 발견하였다. 세탁물을 맡긴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그것을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그것을 지역 신문사에 알렸다. 그래서 신문에 그 기사가 났다. 그 기사를 썼던 기자는 기사의 마지막 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그냥 흘러버릴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 자기 돈이 아니니까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이 오히려 드물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당연한 일이 뉴스거리가 된 것이다.

 

돌려 말하면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직하지 못한 거짓이 판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직이 실종되고, 거짓이 상식이 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고,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post-truth)2016년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독일 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2016년도 올해의 단어로 뽑았다. 거짓이 지배하는 공동체,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솔제니친이 스탈린 시대를 암()병동에 비유한 것처럼 암병동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반드시 도덕적인 위기가 찾아온다. 진실을 잃어버리고 양심이 통하지 않는,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복된 미래를 어떻게 기대할 수가 있을까? 이 시간에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로서 성도다운 삶의 마지막 열매 거짓이 없는 삶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거짓을 부추기는 문화

원 제목은치팅 컬처(Cheating Culture)이고, 부제가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라는 책이 있다. 미국사회의 다양한 편법, 부정, 불법 등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불법의 원인 중에 가장 눈에 띤 것은 그것을 조장하는 문화.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들켰을 때 잃는 것보다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우리나라도 일찍이 부패공화국이란 딱지를 받았다. 특히 기업범죄가 미국 못지않게 화려하다. 처벌이 너무 약하고, 구속이 되어도 대부분 집행유예나 여러 이유로 곧 석방이 되기 때문이다. 재벌총수의 경우 구속만 되면 하나같이 휠체어를 타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영어로 회장을 Chairman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회장은 여기에 바퀴라는 단어를 덧붙여 Wheelchairman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은 이런 문화가 불법과 거짓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특징은 이런 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물론 죄는 경중(輕重)을 따질 수가 없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거짓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그 거짓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좋은 예다. 본문은 초대교회(예루살렘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고 있을 때 일어난 거짓말사건이다(내용설명 생략). 그런데 이 사건은 두 생명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얼마나 거짓을 엄격하고 단호하게 다루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거짓의 심각성을 경고한 것이다.

 

거짓의 유혹에 빠진 이유

본문의 사건은 4장 마지막 부분에 나온 바나바의 헌신(4:36,37)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초대교회는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헌신해서 서로 섬겼다(4:32~35). 압제와 착취가 상식이 된 시대에서 초대교회의 이와 같은 모습은 자랑이고 감동이다. 이는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의 사랑에 중독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일을 가장 탁월하게 했던 사람이 구브로 출신 바나바(본명은 요셉)였다. 그의 헌신이 교회와 사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나바’(위로자=Helper)라고 지어주었다(4:36). 이런 바나바를 부러워한 사람이 있었는데, 본문에 나온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다. 선한 일에 욕심을 갖는 것, 그래서 닮고 싶어서 따라하는 것은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행위는 그들 자신을 불행에 빠뜨린 것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뻔 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거짓으로 들통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거짓행위로 교회 공동체에 부담을 주고, 자신들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허위의식(Coram Populo)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또한 명예를 얻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여기에 과시욕과 허영심(소위 척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면 허위의식을 낳게 된다. ‘히는 순간 허위의식이 풍선에 바람이 들 듯 부풀어 오르게 된다. 그래서 허위의식을 과시욕과 허영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위선적인 의식구조나 행위체계, 사고방식이라고 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허위의식이란 올무에 걸린 것이다. 그들이 밭을 판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고, 그래서 교회로부터 바나바처럼 명예를 얻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것을 코람 포풀로’(Coram Populo)라고 한다. ‘사람 앞에서란 뜻이다. 한마디로 사람 앞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 믿는 , 잘 섬기는 , 주님을 사랑하는 , 교회를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이것은 사단에게 자기 인생의 결정권을 통째로 넘겨준 것과 같다. 허위의식을 갖는 순간 사단이 그들에게 속삭였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잘 보이고, 명예를 얻는 것이 목적이니까 굳이 밭 값을 다 바칠 필요가 있냐? 일부만 바치고 이것이 전부하고 한들 누가 알겠냐?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다 바친척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이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이런 충고를 했을까? 알면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속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을 거짓의 아비(거짓말 대장)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사단의 충고대로 척하다가 그만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질타하셨던 내용이 그들의 허위의식이었다. 그들의 보이기 위한 기도, 보이기 위한 구제, 보이기 위한 금식, 보이기 위한 예배생활, 보이기 위한 안식일 준수, 보이기 위한 십일조를 신랄하게 책망하셨다. 결국은 사람 앞에서 믿음이 좋은 척, 경건한 척, 의로운 척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이런 허위의식이 생명력을 잃은 신앙, 생명력을 잃은 종교로 그들 자신의 신앙과 종교(유대교)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의해 이런 허위의식이 초대교회로 들어오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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