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열매Ⅵ,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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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63회 작성일 17-10-15 13:07본문
지혜의 열매Ⅵ, ‘편견’
약3:13~18, 요9:1~7
2017. 10/15. 11:00
마음속에 있는 두 마리의 개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하나는 ‘선입견’(先入見)이고, 다른 하나는 ‘편견’(偏見)이라고 한다. 그저 웃고 넘기에는 그 숨은 뜻이 가슴을 찌른다. 사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견고한 감옥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가볍게 말해서 선입견과 편견이지, 이들은 ‘교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교만을 원죄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런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두 마리 개를 잡아버리는 한 마리의 특별한 개가 있다. 혹시 이 개의 이름을 아는가? 이 개의 이름이 좀 긴데, 애칭(愛稱)이 있다. ‘일견’(一見)이라고 한다. 이 개의 이름이 무엇일까?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개다.
사실 선입견이나 편견은 직접 보거나 확인하지도 않고 들은 이야기만을 가지고 자기 임의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판단하기에 앞서 직접 보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견(一見)을 키우면 선입견과 편견을 조절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도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눈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특성이 있다. 이를 전문용어로 ‘확증편향성’(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자기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 신념과 일치한 것만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편견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생 편견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다.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잘못 보면 오히려 더욱 심각한 편견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야고보 기자는 성도다운 삶의 원리인 지혜의 열매 여섯 번째로 ‘편견이 없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간에는 편견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한다.
편견의 무서움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미리 정해진 판단’이다. 미리 세워놓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편견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하게 하고, 갈등과 오해를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때문에 편견이 무섭다. 그런데 편견 자체도 무섭지만 편견에 감정이 섞이면 더욱 위험해진다. 이것을 감정적인 편견이라고 하는데, 감정적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도 밉게 보이고, 신뢰가 가지 않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싫게 보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싫어한다.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련된 것까지 싫어한다. 우린 이런 감정적 편견을 선거철마다 혹독하게 경험하게 된다.
비평가 버나드 쇼(B. Shaw)는 영국사회를 관찰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로뎅의 작품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화려한 파티를 열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만 초청했다. 파티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가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그림 하나를 가지고 나와 보여주었다. ‘여러분, 멋있지요? 로뎅의 작품입니다.’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웅성거리다가, 이어서 혹독한 비평이 쏟아졌다. 급기야는 ‘저것도 그림이냐!’ 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이런 비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다시 마이크 앞에 나와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그림을 잘못 갖고 나왔습니다. 이 그림은 로뎅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장내가 숙연해졌다. 이것이 편견의 무서움이다.
예수님도 편견의 희생자셨다.
인간은 편견의 희생자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편견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잘 안다는 것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주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다(막6:1~6). 이는 그들이 주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도 형제도 우리가 잘 아는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냐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 안에 감추어진 신성(神性)을 보지 못하고, 단지 목수로만 본 것이다. 편협한 지식이 편견을 만든 것이다. 주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그 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그 선지자’(요7:40)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41)라고 했다. 그러자 ‘어찌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않았느냐!’(:41,42)고 반박한 사람도 있었다. 어설픈 성경지식과 지역에 대한 편견 때문에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한 장면이다. 주님은 끼니도 거르면서 온갖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료해주셨다. 그러자 유대교 지도자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사로잡혀 이런 능력을 행한 것이라며 주님의 사역을 폄하하는 소문을 퍼뜨렸다(막3:22). 이와 같이 주님을 향해 귀신에 사로잡힌 자니(막3:30) 주정뱅이니 먹기를 탐하는 자니 죄인의 친구니 하는 말들(마11:19)도 모두가 감정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그들의 이런 편견이 주님을 배척한 것이고,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러니 주님께서도 지독한 편견에 시달리신 편견의 희생자셨다.
편견의 치료자
그래서였을까? 주님의 사역은 편견을 무너뜨리고 바로 잡는 사역이었다.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을 치료하는 사역이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이 부정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만나는 것을 꺼렸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셨고, 또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요4:). 당대 지역적 편견의 희생자였던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셨고, 직업적 편견의 희생자인 세리를 비롯한 어부를 주로 제자로 삼으셨다. 또한 사회적 종교적 편견의 희생자인 세리와 창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셨다. 수많은 여성과 대화하셨고, 어린 아이를 환영하여 품에 안고 축복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시혜자로서의 우월을 과시하며 존경받기보다 덧난 상처를 싸매주는 친구로 존재하셨다. 시대가 합의한 편견에 지배받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사회에서 기득권자였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부자를 배제하신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대항하셨지만 편견에 의한 것은 아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화목을 깨는 이 편견의 치유(료)자가 되신 것이다.
요한복음 본문 역시 제자들의 편견을 바로 잡아주신 말씀이다.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2). 이는 장애우에 대한 제자들의 편견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사실 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이런 ‘인과응보적인 사고’는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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