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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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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44회 작성일 10-12-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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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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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독교 선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여기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같은 우수하고 헌신적인 외국 선교사들의 공이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선교사가 현지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복음을 전파한 유일한 나라다). 초기한국교회는 성경보급을 통한 말씀 역사로 말미암아 튼튼한 기초를 쌓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선교 100년 만에 인구의 4분의 1이 신자가 되었고, 이제는 세계 선교를 주도해 나가는 제사장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성경보급에 힘쓴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권서들’입니다. 권서들은 초기한국교회에 몰려온 온갖 시련과 모진 풍상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황무지를 개척한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일제하의 민족 수난기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성경봇짐'을 메고 다니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권서'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선구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교회설립의 모태이자 그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권서들의 뜨거운 선교열정과 희생정신, 그리고 목자의 심정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권서의 유래와 연역

‘권서’(colporteur)라는 말은 불어의 ‘col’(목)이라는 말과 ‘porteur’(운반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즉 권서는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어 물건을 운반한다는 뜻으로 행상인을 가리킵니다. 그 말이 현대에 와서는 성경책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 성경책이나 전도책자를 파는 행상인의 의미로 발전하였습니다(지금도 모 이단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음).   

 

한국에서 권서가 시작된 것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될 즈음이었습니다. 만주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에 의하면, 이 무렵 간행된 복음서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에 반입되었는데 그들은 무보수로 수백 권의 단편성경을 팔거나 배포했습니다. 로스는 1882년 10월 6일 한국 최초의 권서인 서상륜에게 500권의 단편성경과 그 밖의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평안도 의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로스의 또 다른 편지에 의하면 권서 류순천은 1883년 고향 평양에 그의 어머니를 병문안차 방문하였다가 평양에서 성경을 보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서상륜에게 두 상자의 성경책을 줌으로 서울에서도 복음전도가 시작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류순천의 전도가 1885년에 조선 땅에 온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역보다 2년이 빨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 권서들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초기 권서들은 조선 땅 이외에도 한인들이 살고 있는 만주나 압록강 주변에서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19세기 말 에는 연평균 30명대를 밑돌던 권서수가 1908년에는 70명대에 이르고 1910년에 는 238명에 육박하였습니다.

 

 

2. 권서의 임무와 선발

권서는 그 사역의 특성상 사명감이 투철하고 믿음이 좋으며 특히 책판매에 탁월한 소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권서의 선발조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격심한 육체노동에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갖춘 자. ②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특심한 열정을 소지한 자. ③주위로부터 칭찬을 받는 덕망을 갖춘 자. ④돈의 유혹에 잘 빠지지 않는 자. ⑤한문을 잘 알고 어느 정도의 지식수준을 갖춘 자 등 이었습니다.

 

권서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처음에 무슨 말부터 전도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실전 판매 전략을 교육받았습니다. 또 상류 지식층을 상대하기 위해서 논어, 맹자 등 중국 고전을 배워야 했습니다. 미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 필요한 경우 성경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당시 윤성근이라는 권서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었는지 '살아있는 성구사전'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연해주 지방에서 활약한 권서 안용환은 러시아 정교회 소속인 두 젊은이와 진화론을 가지고 토론을 해서 마침내 이들을 복음에 굴복시켰습니다. 그 결과 그 지방 20가구 중 10가구의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본래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드리는 '합동 제사의식'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의 반이 신자가 됨에 따라 자연히 이 제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춘경 권서가 쓴 글에 의하면 권서는 다음과 같은 마음 자세로 사명에 임해야 했습니다. ①우리가 파는 책은 하나님의 묵시로 된 성경이며, 사람들이 읽고 구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②겸손과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이며 온유하고 화평한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③핍박을 받더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 ④숙식할 때에는 교우나 불신자들에게 폐가되지 않도록 식비를 넉넉하게 갚아야 한다. ⑤상대방이 귀하든 천하든 각기 그 처지에 맞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⑥찬송가를 열심히 연습하여 아름다운 찬송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⑦책값은 반드시 목사에게 솔직히 밝히고 접수해야 한다. 등 이었습니다. 1908년에 권서 1인당 월평균 성경판매량은 70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권서들에 대한 조직적인 훈련을 시킨 후에는 현저하게 성경판매량이 늘어나서 1913년에는 297권으로 4배나 성장하였습니다. 임선호라는 권서는 일주일 만에 성경 323권을 팔았고, 하루에 최다 60권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3. 권서들의 활동상황

권서들은 매일 아침 7-8시까지 찬송과 기도, 성경공부을 갖고 오전 9시부터 둘씩 짝을 지어 판매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100-150권의 책을 ‘복음궤짝’이라 불리던 상자나 봇짐에 넣어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권서는 당나귀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걸어 다녔으며 점심은 아침에 준비한 찬밥과 짠지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후 주위환기, 흥미유발, 구매욕구 유발, 구매결심의 4단계 판매전략에 따라 판매를 하였습니다. 원칙적으로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판매와 전도에 열중하다보면 밤 9시를 넘겨 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다시 ‘사랑방 전도모임’을 가졌고 개종자가 생기면 근처 교회에 연결시켜주고 그 지역을 담당하는 권서가 계속해서 그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권서들은 자기가 책임 맡은 구역은 한 곳도 빼지 않고 모두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밀집한 장터나, 교도소,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 도박판, 아편소굴, 궁 궐, 나룻터, 학교, 심지어는 산중의 절간까지 그들은 하루 평균 20Km이상 걸어 다녔습니다. 특히 권서들이 즐겨 찾는 곳이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터였습니다. 그들은 장터 한 구석에 성경과 카렌다, 쪽복음, 교리문답 등을 펼쳐놓고 찬송을 부르며 열심히 성경을 팔았습니다. 부모 손잡고 장에 따라온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주고는 이들을 감동시켜 성경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해질녘이 되면 술에 취한 장꾼들을 피해 여인숙으로 가서 그곳에서 성경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격동기 가난한 백성들에게 생활필수품도 기호품도 아닌 성경을 판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땅을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땅과 곡식마저 빼앗기니 헐벗고 굶주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는 한 권의 성경보다 한 줌의 쌀이 더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권서들은 “사람이 떡으로 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를 외치며 확신 있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예 한글을 가르쳐서라도 성경을 팔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조선의 백성들을 구원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독하게, 끈질기게, 악착같이 성경을 권하고 팔았습니다. 권서들은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성경을 무료 로 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이 없으면 곡식이나 생선, 계란, 옷, 성냥 등을 받고 성경과 교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홉스 선교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공짜로 주면 귀히 여기지 않고 성경을 잘 읽지도 않습니다.’

 

권서들은 가난과 무지와 미신과 서양종교에 대한 나쁜 선입관 등으로 많은 경멸과 모욕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서양귀신에 들렸다며 마을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피로 물들기도 하였습니다. 산속을 헤매다가 산적을 만나거나 호랑이, 반달곰에게 찢기기도 하고 시장터에서 몰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산골마을을 심방하다 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동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순사에게 독립군 첩자로 오인 받아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김창모 권서 같은 사람은 일본순사에 의해 독살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형편없는 식사에, 더럽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객사에서 자야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고통과 어려움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순직하거나 병들거나 일찍 은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석현 권서는 남천에서 성경을 팔고 있는데 깡패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더러운 예수쟁이! 저리 꺼져’ 깡패들은 그를 죽이고자 그의 옷을 벗기고 칼로 위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또 올 것입니다. 만일 당신들이 날 죽이면 다른 권서들이 올 것이요.’

 

안교철 권서는 자신이 경험한 감동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한 가난한 여인에게 성경을 권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계란이라도 하나 주면 성경을 팔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하루에 한 끼 먹고 사는 데 오늘은 그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불쌍하여 내가 돈을 내고 성경을 사 줄 테니 읽어 보라고 했다. 성경을 받아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 여인은 잠시 후 동 전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책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 이 돈을 이웃집에서 빌려왔으니 책값으로 받아 주십시오.’ 내가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그 여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아무리 가난해도 반드시 대금을 지불하던 풍토는 결국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자립할 수 있는 영적 환경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권서들은 하루 100리 길을 걸어 성경 하나를 팔고 나서 차디찬 꽁보리밥에 짠지 하나를 얹어서 도시락을 먹을 때는 참으로 꿀맛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한 권도 팔지 못한 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언제나 스피릿(spirit)이 충만했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희생적인 노력으로 일한 권서들의 수고는 점점 열매를 맺었습니다. 1914년 대구에서 미국 선교사 블레어가 성경공부반을 열어 교인들에게 어떻게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50명 중 12명은 개인전도를 통해, 2명은 교회에 놀러왔다가, 2명은 전도지를 보고 그리고 20명 은 권서가 전해준 복음서를 읽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1902년 송도에서 콜리어 선교사는 5년간의 활동으로 307명의 교인을 얻었는데 이중 70%가 권서들의 열매였다고 말했습니다.

 

클라크 선교사는 자신과 함께 권서 한덕니씨를 가리켜 ‘나의 별’과 같은 권서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는 한덕니의 하루 행적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오늘도 10마일 정도의 산골마을을 방문하고 왔다. 나는 그에게 오늘은 몇 집이나 갔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교사님! 오늘은 기껏해야 30집 밖에 못 갔습니다. 선교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단지 책만 팔고 그냥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쉽지요. 그러나 저는 책을 산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러 갈 때마다 권서들이 피와 땀으로 일궈 논 사명의 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권서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권서들은 외국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을 없애주고 현지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세례요한’적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베시 선교사는 권서들의 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권서들에게는 평범한 일이 없고 또한 쉬운 일도 없다. 그들의 사역은 모든 선교사역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전도사역의 척후병 역할이다. 그들은 영원히 전진하는 십자군의 공병이요 지뢰제거 병들이다. 이들은 이 적대적인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더 빨리 전파하려고 길을 예비하고 있다.’

 

권서 중에는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인권서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형제들이 들어갈 수 없는 부엌과 바느질방을 개척하였습니다. 용기종기 모여 앉아 남편 흉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여인들에게 부인권서들은 다림질도 도와주고 함께 파도 다듬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인권서들은 하루 종일 성경을 읽어주고 저녁으로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 부인은 150명에게 글을 가르쳤고 10,110에게 성경을 읽어주었고 13,066권의 성경을 판매하였습니다. 원 다비다 부인은 과부에다가 자식도 없이 주막에서 일하며 막걸리와 담배로 한 많은 인생을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권서 부인들의 전도로 거듭나 모은 재산을 몽땅 드려 성경과 찬송가를 사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70세 이상까지 여름 장마와 겨울의 폭설을 견디고 산간지대를 다니면서 3천명에게 설교하고 1,750권의 성경을 판매하여 ‘평화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권서들이 수고한 결과 1908-1940까지 한국의 전체 성경 보급의 85%가 권서들의 ‘부르튼 발’과 ‘복음 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참고 1938년은 940,416 권). 선교사 그리어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서들의 사역을 들어보면 마치 사도행전의 한 장을 읽는 것 같다." 이처럼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충성한 권서들로 인해 무지와 가난과 우상숭배의 나라 한국은 점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술고래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성황당을 섬기던 무당이 신자가 되었으며, 승려까지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고통과 환난을 감내하며 적극적으로 복음사역에 투신했던 권서들의 피땀 어린 희생 덕택에 한국교회는 점점 견고히 서고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권서들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열심히 성경을 팔러 다닌 것은 결코 어떤 이윤을 얻고자 하는 사업적인 목적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만이 어둡고 절망적인 조선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생명선임을 믿었기에 한 권의 성경을 파는 데 그들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로마서10:15절은 말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삼천리 방방곡곡을 ‘성경보따리’를 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부르트고 찢긴 권서들의 발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발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처럼 묵묵히 주께 헌신한 권서와 같은 자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위 글은 퍼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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