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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밟기의 신학적인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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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828회 작성일 10-11-0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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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밟기의 신학적인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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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최바울 선교사(인터콥 대표)가 기독청년들이 봉은사에서 행한 ‘땅 밟기’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땅 밟기 기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너희가 밟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땅을 밟고 기도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라 했다. 다른 하나는 '영적 전쟁'으로, 영적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기도하는 것이 '땅 밟기'이기에 당연히 전투적·공격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나안 정복 때의 땅 밟기

전자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정복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다(신11:24, 수1:3). 이 말씀이 봉은사에서 기독청년들이 한 일을 지지하는가? 만약 지지한다면 교회가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계나 일반 사회에서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다. 하나님의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공간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가나안 족속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을 멸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오늘날 다른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곳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가? 전혀 아니다. 정반대이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합당한가를 돌아보도록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땅으로 삼으신 가나안은 오늘날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교회와 연결된다. 이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복음 전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방식이 바뀌었다. 그 이전에는 국가의 형태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방식은 하나님과 그분의 하신 일을 선포하거나 설명하고 이해와 수용이라는 것이다. 가나안 땅 정복 때와 같은 무력은 그 어떠한 것도 그 방식으로 지지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밟는 가나안 땅을 모두 주시겠다는 말씀은 이 시대의 교회가 어떤 지역을 밟으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봉은사 땅을 밟았다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교회의 것이 되도록 하시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봉은사 땅을 교회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에 그러한 역사를 행하시지 않는다.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이제는 그런 허접한 성경 해석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영적 전쟁으로서의 땅 밟기

바울 사도는 교회(신자)의 영적 전쟁을 언급하였다.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이게 무슨 뜻인가? 성경은 명백하게 공중 권세 잡은 자이며 세상 임금인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이다. “네 마음대로 살아라”가 지배 방식이다.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이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살기에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자도 원래는 그의 지배를 받았다. 거듭나기 전에는 똑같은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사탄의 지배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탄은 그것을 위하여 여러 모양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한다. 나는 고등 종교도 그 방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봉은사에 가서 땅 밟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런가? 전혀 아니다.

 

바울 사도의 권고에서 그 문맥을 살펴야 한다. 그가 영적 전쟁을 말한 문맥은 신앙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진술이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주인이라는 인간관계를 말하고 영적 전쟁을 언급하였다. 인간관계는 영적 전쟁의 전제이다. 영적 전쟁의 현장이다. 영적 전쟁은 신자의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인간관계를 가로막거나 왜곡하는 현장이 바로 영적 전쟁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인간관계를 이루는 것이 영적 전쟁의 실체이다. 이는 확장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로잡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부정과 불의, 거짓과 위선, 탐욕과 억압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인생과 자연을 해방시키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영적 세력과의 직접적인 전쟁

분명히 사탄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 있다. 오늘날 다른 종교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땅 밟기를 하는 것이 옳은가? 이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때를 생각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당대는 황제 숭배 사상이 만연하던 때이다. 황제 숭배 사상은 그 당대의 절대적 가치였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신앙에 대한 가장 적대적이었다. 많은 신자들이 황제 숭배 사상을 거부하고 순교하였다.

 

황제 숭배 사상에 대해 그 당시의 교회가 어떻게 했는가? 그 제단에 가서 땅 밟기를 하였는가? 그것에 대해 사탄의 도구라며 비난하기라도 했는가? 그런 내용은 신약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초대 교회의 공적 가르침에도 그런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황제 숭배 사상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세상이다.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사람에 속한다. 교회는 그분의 원하심을 실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모습을 따르는 사랑이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가 적대시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여야 할 대상이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과 같은 방식 곧 겸손과 희생 그리고 헌신을 통하여 사랑하여야 할 대상이다.

 

신약 성경은 황제 숭배 사상 자체에 대해 시시비비하지 않는다. 오직 교회가 교회답게 사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심을 나타내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여서 온갖 조롱과 비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사찰을 찾아가서 땅 밟기라는 말인가? 하늘의 하나님께서 비웃으실 일이다.

 

백투 예루살렘

인터콥의 중요 사역이다. 복음의 종착지로 예루살렘을 잡고 그곳에서 국가적인 회심을 일으키려는 운동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서 행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11:26)고 말씀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문맥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다. 바울 사도가 그 편지를 쓰는 시점에서 옛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다. 그 이스라엘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멸망과 돌성전 파괴를 통하여 언약 관계가 끊어졌다.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폐하신 것이다. 옛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이 공존하던 시대를 끝내신 시점이다. 옛 언약이 파기되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언약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국가를 재건하였지만 언약의 백성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국가가 아니고 유대인들은 언약의 백성이 아니다. 한 불신 국가일 뿐이고 각기 한 불신자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남한이나 북한과 다르지 않은 한 불신 국가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불신자와 똑같다.

 

바울 사도의 진술은 주후 70년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 관계를 끊으시기 이전에 남은 자를 모두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2,000 여년이 지난 지금이나 지금 이후의 어느 시점에 있을 전국가적인 이스라엘의 회심을 가리키지 않는다.

 

투 이스라엘은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여서 나타난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땅 밟기에 대한 최바울 대표의 찬성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고서는 자기 하고 싶은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주장일 뿐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모습이 한국교회에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일은 현상 이전에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의 문제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현상을 아무리 말해도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한다. 자기 내키는 대로 듣는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교회 개혁을 말한 지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임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 교회(신자)의 의식과 현실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

 

성경 해석이야, 성경 해석

성경 해석의 문제가 가장 일차적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짐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사안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바른 해석이라는 말에는 그 본문이 그 당대에 가진 의미를 바르게 밝히는 것과 오늘날에 어떤 의미인가를 동시에 담고 있다. 그 당대의 의미를 바르게 밝히고 원리화하여서 이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은 그 원리에 맞추어가는 것이다. “경제야, 경제”라고 외치는 세상과는 달리 교회는 “성경 해석이야, 성경 해석”이라고 외쳐야 한다. 언제쯤이면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가장 비중있게 다루면서 현상도 살펴 제대로 된 교회 개혁이 이루어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박창진 목사(2010. 11/2 국민일보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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