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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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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44회 작성일 11-08-0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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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칼의 대화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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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어느 방의 모퉁이에 칼이 하나 서 있었다. 강철로 된 그 칼의 밝은 쪽은 햇빛에 부딪힐 때면 불그스레한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칼은 자랑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광채에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라고? 그렇지만은 않았다. 저쪽 책상 위에서 한가롭게 잉크병에 기대어 있는 펜은 빛을 발하는 칼의 위엄 앞에서 고개 숙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칼은 격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찮은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다른 것들처럼 내 광채 앞에서 고개 숙여 찬미하지 않는가? 네 주위를 둘러보아라! 모든 도구들이 경외심으로 가득 찬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휩싸여 있는데, 밝고 행복하게 해주는 태양이 단지 나만을 총애하는 자로 선택했어. 태양은 환희에 찬 불꽃같은 입맞춤으로 나에게 생기를 주지. 그리고 나는 태양의 빛을 수천 갈래로 다시 비추면서 그 빛에 보답하고 있어. 번쩍이는 옷을 입고 우쭐거리며 활보하는 것은 권력있는 제후들에게나 어울리는 거야. 태양은 나의 힘을 알고 있어. 그래서 태양은 왕과 같은 자줏빛 광채를 내 어깨에 비추는 거지.”

 

생각에 잠겼던 펜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봐, 너는 참으로 천박하고 거만해! 자기 것도 아닌 광채로 그렇게 뽐내다니! 곰곰이 생각해봐. 우리 둘은 아주 가까운 친척이야. 우리는 우리를 보살펴주는 땅에서 태어났잖아. 어쩌면 우리는 원래 같은 산맥 속에서 나란히 있었던 건지도 몰라. 수천 년 동안 말이야. 인간이 부지런하게 우리를 이루고 있던 유용한 광석의 광맥을 찾아낼 때까지 말이지. 사람들이 우리 둘을 훔쳐낸 거야. 거친 자연의 볼품없는 자녀인 우리 둘은 증기 나는 대장간의 열기 위에서, 망치에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서 이 땅에서 활동하는 데 쓸모 있는 자가 되도록 변형된 거란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도 된 거지. 너는 칼이 되어 크고 단단하고 뾰족한 끝을 하게 된 거야. 펜인 나는 가늘고 귀여운 뾰족한 끝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정말 일하며 활동하려면 반짝이는 끝을 축여야만 해. 너는 피로, 나는 다만 잉크로 말이야!”

 

“네 말은 제법 배운 티가 나지만, 나를 정말 웃기는 구나!”

 

라고 칼이 말을 가로 막았다.

 

“마치 보잘것없는 조그만 동물인 쥐가 코끼리와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다고 증명하려는 거나 다름없어. 그 쥐는 너처럼 말했을 거야! 쥐도 코끼리처럼 네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 긴 코까지도 뽐내야 한다는 거라고. 그들이 먼 친척도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지! 펜인 너는 지금 대단히 약삭빠르게 계산을 하면서 내가 너와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번쩍거리며 자랑스러운 나 칼은 용맹하고 고귀한 기사라 허리에 차게 될 거야. 그렇지만 너는 한 늙은 글쟁이가 자기 당나귀의 기다란 귀 뒤에나 꽂게 되겠지. 나의 주인은 힘센 손으로 나를 붙잡아 적진 속으로 데려갈 거야. 그러면 내가 그를 이끌게 될 거야. 잘난 너를 너의 선생은 떨리는 손으로 누런 양피지 위로 옮겨가겠지. 나는 적군들 속에서 공포에 부르르 떨며 이리저리 앞뒤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움직이지. 그러나 너는 끊임없는 단조로움 속에서 양피지 위를 끼적거리면서, 너를 이끄는 손이 조심스레 가리키는 궤적에서 감히 벗어나지 못하겠지.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는 나의 힘의 소진되겠지. 내가 늙고 힘없어지면, 경받게 될 거야. 영웅들이 그렇듯이 말이지. 사람들은 나를 선조들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홀에 전시하면서 감탄할 거야. 하지만 너는 어떻게 되지? 너의 주인이 너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네가 늙어서 종이에 굵은 선을 그으며 끼적거리기 시작하면, 그는 너를 움켜잡고, 너의 받침대였던 펜대에서 뽑아내어 내다버릴 거야. 만약 그가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너의 몇몇 자매들과 함께 몇 푼 안 되는 돈에 고물장수에게 팔아버리게 된다면 말이야.”

 

펜이 아주 진지하게 대꾸했다.

 

“여러모로 보아 물론 네 말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지. 내가 종종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야. 내가 쓸모없게 된 후에 나를 아주 형편없이 다루는 것과 같이 말이야. 하지만 이 때문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흠은, 내가 일할 수 있는 한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야. 물론 내기도 할 수 있지!”

 

“나와 내기를 하자는 건가?”

 

거만한 칼이 웃었다.

 

“네가 내기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런데 내가 그 내기를 받아들일지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칼이 대답했다.

 

“무슨 내기를 하지?”

 

펜이 제자리에 앉으면서, 뽐내는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한다면, 네가 일이나 전투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기로 하지!”

 

“그래? 그것 참 대담하군.”

 

“맘에 들어?”

 

“내기를 하지.”

 

“좋아, 한번 해보자고.”

 

펜이 말했다. 내기를 한 후 몇 분이 흐르자, 훌륭한 전투복 차림의 한 젊은이가 들어와서 칼을 몸에 찼다. 그러고 나서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빛나는 칼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트럼펫소리와 우렁찬 북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전투가 시작될 찰나였다. 그 젊은이가 방을 막 나서려 할 때,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화려한 보석장식을 한 것으로 보아 지위가 꽤 높아 보였다. 젊은이는 그 사람에게 몸을 깊이 숙여 절을 했다. 그 고위직 사람은 책상으로 가서 펜을 쥐고는 황급히 무언가를 썼다.

 

“평화조약이 이미 체결되었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젊은이는 자기의 칼을 다시 모퉁이에 놓았고,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그러나 펜은 책상 위에 계속 놓여 있었다. 햇빛이 노닐듯이 비추자, 축축한 그 펜이 환히 빛났다.

 

“칼아, 너는 전투에 나가지 않니?”

 

펜이 웃으면서 물었다. 하지만 칼은 어두운 모퉁이에 말없이 서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칼이 다시는 자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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