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이기게 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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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57회 작성일 24-11-03 14:09본문
그럼에도 이기게 하신 하나님
삼상14:47~48
2024. 11/3(성령강림 스물다섯 번째 주일)
기다림과 서두름(Warten und Eilen)
어떤 분이 성도의 삶을 ‘기다림과 서두름’(Warten und Eilen)으로 표현하였다. 성도는 일상을 거룩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주님의 나라와 뜻을 잠잠히 기다려야 하며, 동시에 그 나라와 뜻을 서두름으로 준비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와 뜻을 향한 기다림과 서두름은 성도가 취해야 중요한 태도다. 기다려야 할 때 서두르거나 서둘러야 할 때 미적대며 지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곧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상13장 이후에서, 이 두 가지가 자꾸 어긋나고 있는 모습을 사울에게서 볼 수가 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자신의 권한 밖인 제사장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지도 구하지 않은 사울의 경솔한 행동이 낳은 결과다. 균형잡힌 성도의 삶은 기다림과 서두름의 균형에 있다. 이는 기도생활을 통한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일에서 시작이 된다.
믹마스 전투
삼상13~14장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발생한 ‘믹마스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 전투는 성경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정복전쟁을 제외하곤 침략전쟁을 허용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믹마스 전투는 이스라엘이 공격한 전쟁이다. 사울은 왕이 된 후 최초로 수행한 전쟁, 곧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한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11장). 소위 그의 왕권을 검증할 수 있는 왕의 데뷔전이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모든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여 길갈에서 즉위식(대관식)까지 갖게 되었다. 그런데 13장에서 자신의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침략전쟁을 도모했다. 이것이 소위 ‘믹마스 전투’다.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치도 않는 침략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시작을 한 것이다(다윗과 사울의 결정적 차이).
이 뿐만 아니다. 막상 전쟁을 일으켰으나 막강한 적을 보고 두려워서 진영을 이탈하는 병사가 늘어났다. 이를 막고자 자신의 권한 밖인 제사까지 집례하였다. 마침 요나단의 용기있는 행동이 전세(戰勢)를 이스라엘이 유리하도록 만들었으나 엉뚱하게 금식명령을 내려서 백성과 요나단을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사울이 기다림과 서두름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울의 왕권이 강화되고 나라가 든든히 서게 되었다.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적어도 성경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곧 신앙에서 떠난 행위들은 항상 처참한 실패로 드러난다(신28:). 이 사실을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여리고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스스로 계획을 세워 아이성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참패였다. 비슷한 일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오랫동안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미나답의 집에 모셔져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도 그랬다(삼하6:). 다윗은 임의로 3만 명의 사람을 모으고,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미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로 수레를 몰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가 뛰면서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했고, 웃사가 손을 뻗어 언약궤를 붙잡았다. 그때 참사가 발생했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셔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뜻하지 않는 사태로 언약궤 모시는 일이 중단되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뜻깊은 일이 왜 이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그것은 언약궤 모시는 방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언약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이동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하나님의 뜻이나 방법이 아니면 실패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다.
그런데 믹마스 전투는 그 결과가 반대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울의 불신앙과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 백성을 실족하게 만들고 요나단을 위기에 빠뜨린 엉뚱한 명령에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 의외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크게 패배하고, 사울이 큰 위기에 처해야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주셨다. 이것은 사울의 행위와 상관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12:22). 즉,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사울의 불신앙과 권한 밖의 행위, 그리고 엉뚱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기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우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사울의 행위가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말한다. 끝이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싸우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를 강하게 쳐서 기절시켰다. 놀라 병원으로 옮겨 머리 CT를 촬영했다. 맞은 곳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대신 머리에서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다. 조기에 발견이 되어 다행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머리를 맞은 것 때문에 종양을 일찍 발견하게 되었으니 머리를 친 사람의 폭력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물론 정상 참작은 되고, 맞은 사람 또한 당신 때문에 조기에 종양을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사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폭행행위 자체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로, 심한 갈등으로 교회가 나뉘게 되었고,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본 교회 곁에다 새로운 교회를 세워 한 지역에 두 교회가 세워졌다. 두 교회가 서로 경쟁적으로 열심히 전도하고 섬겨서 그 지역이 크게 복음화가 되고 두 교회가 다 부흥했다. 어느 날, 교회를 갈라서 나온 사람들 중에 한 분이 자랑스럽게 말한 것을 들었다. 교회가 갈라진 것은 유감이나 이 때문에 지역 복음화가 크게 이뤄지고, 교회가 두 개나 세워져 부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역 복음화가 크게 이뤄지고 두 교회가 다 부흥이 된 것은 좋은 일이나 그렇다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어지럽히고 나뉘게 한 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세상 법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법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좋으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그들의 악한 행위까지 선용하신 것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그 책임을 추궁할 날이 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오기 전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기게 하시고, 잘 되게 하시고, 이루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잘못을 회개하고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의 중요성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녀로 선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6b~7). 그래서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원리를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이는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성도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즉,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삶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 원동력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삶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크게 실족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세가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일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모세가 드렸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32:11,12).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백성을 사하여 달라고 애원하였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켜 진노를 멈추셨다. 본문 또한 묵상해 보면 여기로 귀결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울의 불신과 불법에도 불구하고 이기게 하시고,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위하여
다니엘 기도회 첫 날 설교에서 사62:7절 말씀에 도전과 은혜를 받았다.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는 선지자가 파수꾼에게 권면한 말씀으로 되어있으나 하나님 자신의 다짐이기도 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재건하시어 세상의 자랑거리로 만들기 위해 졸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시며, 심지어 쉬지도 않으시겠다는 다짐의 말씀이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도대체 이스라엘이 무엇이라고, 그토록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들을 위해 이런 다짐을 하신 것일까?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자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잘 되고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다짐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너희를 통해 내가 영광을 받고 싶다는 의미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린 바울은 먹고 마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되게 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 우리의 모든 일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gerheojhQmQ 181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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