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찾아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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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540회 작성일 24-07-21 14:16본문
서둘러 찾아오신 예수님
요4:1~8
2024. 7/21(성령강림 열 번째 주일)
찾으시는 하나님
요즘도 심심치 않게 사람을 찾는 광고를 접한다. 며칠 전, 전남경찰청에서 여수 사는 김모씨를 찾는 광고 문자를 받았다. 성경도 보면, 사람을 ‘찾으시는’ 혹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을 어기고 두려워 동산 숲에 숨은 아담을 찾으신 이야기를 비롯하여, 심판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 노아를 찾아오시고,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범죄현장을 찾아오시고, 구원의 역사를 위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지내는 모세에게 민족구원의 사명을 맡기기 위해 찾아오시고, 이집트 왕 바로에게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셨다. 낙담하여 로뎀나무 그늘에 누워서 자고 있는 엘리야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시고,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이사야를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 선지자를 찾아오시고, 사자굴 속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한 다니엘을 찾아오셨다. 여러 사람을 다양한 이유로 찾으시고, 또한 찾아오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찾으심은 신약에서도 계속된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이 가장 절정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시간과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셨다. 이러한 주님의 행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복음서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12사도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찾아다녔고, 그 발걸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복음의 역사가 이렇게 크게 일어난 것도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본문 역시 ‘찾으심’의 한 사건이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리고 유월절을 마친 다음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지역(아마도 요단강 주변)으로 가셔서 거기 함께 거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세례를 베푼 것은 주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음). 그러던 주님께서 급히 갈릴리로 가시게 되었다. 문제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길이다. 주님은 요단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편한 길을 두고, 훨씬 멀고 불편한 사마리아로 우회하여 가는 길을 택하셨다. 특히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 훨씬 가까워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경우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3일이면 갈 수 있는데, 5~6일 이상 걸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서 요단계곡을 따라 가는 길을 택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보다 싫어하여 그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지나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랍비 엘리저는 ‘사마리아의 우물물은 돼지들보다 더럽고, 사마리아 사람의 빵을 먹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유대인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그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리아의 우물과 사마리아 사람을 이런 돼지보다 더 더럽게 여겼다. 그래서 유대인은 지름길을 두고도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먼 길로 다녔다. 그래서 주님도 평소에는 요단계곡의 길로 다니셨다.
그런 주님께서 본문에선 아주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신 것이다. 지금 주님이 계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요단계곡 어느 곳인데, 지름길을 두고 멀리 우회해서 유대인이 극도로 꺼리는 그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본문은 주님의 이런 결정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된’ 결정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 여기서 ‘하겠는지라.’에 해당되는 헬라어 ‘데이’(δει)는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엄격한 의무를 뜻하는 영어의 조동사 ‘must’와 같은 의미다. ‘꼭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I will)를 담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통과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주님께서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부득불 그 길을 결정하신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무슨 일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하신 것일까?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사건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편견을 넘어서는 복음전도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구원을 받아야 할 영혼은 주변에도 많았다. 이런 영혼을 두고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주님께서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기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일까? 이렇게라도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랬을까? 놀랍게도 주님께서 만나신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것도 지역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다(8). 그러다보니 지역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를 당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어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와 같은 여인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6~7절 말씀이다. 본문에 주님과 이 여인이 만난 시간이 나온다. ‘때가 여섯시 쯤 되었더라.’(6). 이‘여섯시’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에 해당된다. 가나안 지역은 한 낮이 되면 온도가 40도 이상 올라간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다들 바깥 활동을 멈추고 집안에서 쉰다. 그런데 이 시간에 주님은 여행을 하셨고, 이 여인은 홀로 물을 긷기 위해 우물가로 나왔다. 주님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절박함 때문에 이 시간에 여행을 하신 것이고, 이 여인은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 때문에 이 시간에 물을 긷기 위해 나온 것이다. 하여간 이와 같은 주님의 행보는 복음과 복음전도에 대한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우선,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특징이다. 우리는 신체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많은 편견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이런 편견이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런 편견의 희생자가 본문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이고,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굳이 먼 길을 돌아서, 누구도 가지 않으려고 한 곳을 주님께서 가신 중요한 이유다. 복음 안에서 이런 편견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복음전도는 이런 편견을 넘어서야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라’고 하실 때 사용한 단어는 헬라어로 ‘에크발로’(ἐκβάλλω)이다. 에크발로에는 크게 3가지 뜻이 있다. ➀돌파하다. ➁(귀신 등을)쫓아내다. ➂쳐놓은 경계를 넘어서다는 뜻으로, 그저 ‘Go’(가라)보다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복음전도를 위해 모든 편견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베드로의 고넬료 전도). 또한 복음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쉬운 길, 안전한 길을 버리고 먼 길,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택하신 이유다. 편견의 희생양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이것이 주님이 전하신 복음의 특징이다.
생명에는 희생이 따른다.
복음전도는 ‘컴포트 존’(Comfort Zone)를 넘어서는 일이다. 익숙하고 안락한 안전지대를 넘어서지 않고는 복음의 확장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이라는 컴포트 존을 넘어서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확장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희생과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일부러 사마리아를 통행하신 또 하나의 이유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위험과 수고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 가까운 구역이 드린 찬양 2절이 이를 잘 반영한다. ‘험산준령 헤매이는 어린양 찾아 나의 주님 산 가시에 찔리셨도다. 양을 위해 생명 바친 목자의 수고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지라.’ 복음전도는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실천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그만큼 소중한 생명의 희생이 따른다. 여기에 있는 화초의 생명을 살리고 유지하는데도 수많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영혼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복음은 누군가의 목숨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복음은 피의 복음이고, 희생의 복음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는 말씀처럼, 피흘림이 없으면 복음도 전해질 수 없다. 희생이 없으면 복음도 전해질 수 없다. 한 영혼의 심장에 십자가가 세워지려면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한다. 목숨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라는 단어에서 순교자란 단어가 나온 것이다. 증인은 목숨을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제 목숨을 잃어야 구원하리라고 하셨다. 제 목숨은 나의 목숨이다. 나의 생명, 나의 생애,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사랑..... 오직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잃을 때, 아낌없이 드릴 때, 비로소 남을 구원할 수 있다. 한 영혼의 심장에 십자가를 세울 수 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말이다. 본문에서 주님이 별 볼 일 없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멀고 험한 길, 어려운 길을 선택하신 이유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0f2VH3lSRVk 63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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