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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또 함께, 그리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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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213회 작성일 24-05-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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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또 함께, 그리고 함께

18:1~4

2024. 5/26. 11:00(성령강림 둘째 주일)

경건한 부부의 모델

1984년 기네스북에 가장 이혼을 많이 한 사람으로 스코트 월프라는 사람이 등재되었다. 이 사람은 무려 26번 이혼을 하고, 27번째 아내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친구가 물었다. ‘자네 인생에 후회가 있다면 어떤 점인가?’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나는 한 아내와 더불어 살고 싶네내 인생에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없었네.’ 많은 사람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으나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없었던 것이다건강한 가정 속에 인생의 행복이 있다. 시인 괴테의 말이다. ‘왕이나 평민이나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톨스토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가정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어디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이 사회가 밝아지고 건강한 나라가 되려면 가정이 바로 세워져야 한다교회도 마찬가지다그리고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부부에게서 비롯된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에서 건강하고 경건한 부부의 모델을 의외로 찾기가 힘들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의 부부를 비롯해서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델로 내 세울만한 부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문제없는 사람이 없듯이 문제없는 부부 또한 없다는 것을 반면교사를 삼아 건강하고 경건한 부부가 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런 와중에 건강하고 경건한 부부가 본문에 소개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부부다. 오늘은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두 번째 주일이자 가정주일이기도 하다이 중요한 주일에 건강한 경건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대하여 생각해 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요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가정에는 별의별 가슴 아픈 사연, 험악한 사건, 그래서 사랑이 식어버린 비정한 부부의 이야기가 많다. 이런 중에 본문에 소개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모범적이다. 남편 혼자 잘 믿거나 아내 혼자 믿어보려고 씨름하는 가정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이 함께 잘 믿고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이런 의미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향기로운 부부, 모범적인 부부, 본받을 만한 부부의 대표다.

 

아굴라’(Aquila)는 소아시아 지방 본도(Pontus)출신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다. ‘브리스길라’(Priscilla)브리스가’(Prisca)라는 이름의 애칭이다. ‘브리스가는 로마의 귀족가문으로 그녀는 귀족가문의 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아굴라는 유대인이었고, 브리스길라는 로마인이었다는 것이다. 평범한 유대인 남자가 로마 귀족가문의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참으로 흔치 않는 일이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Claudius, 41~54) 황제가 로마지역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 때 로마로부터 고린도에 갔다(2)가 거기서 사도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 사실 그들은 바울이 선교사역 기간에 만난 최고의 부부였다. 바울의 사역이 위대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이들과 같은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을 만난 만남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대를 함께 이겨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그 이유가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기록에 짤막하게 나온다. 유대인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문제를 일으키므로 로마에서 추방했다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크리스투스(christus)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갈등으로 본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당시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았기에 어느 한쪽이 아닌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때 추방을 당하여 고린도로 이주한 것이다. 사실 강제추방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터전은 물론 사회적 보장도 다 빼앗기고 쫓겨난 것을 뜻한다. 로마시대의 옛 문헌에서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이란 학자가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단어를 발견했는데, 호모 사케르는 누구나 죽여도 살해의 책임을 지진 않는, 법이 보호하지 않는 존재들을 뜻한다. 당시 사회에서 추방을 당한 사람이 호모 사케르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다. 놀라운 것은 남편(아굴라)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는데, 아내(브리스길라)가 선 듯 따라 나선 것이다. 사실 그녀는 로마귀족 출신이기에 갈라서면 그만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크게 비난을 받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편과 함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46%인데(OECD국가들 중에 9, 아시아에서는 1), 그 이유 1~3위가 성격차이, 경제적 어려움, 배우자의 부정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 중 어느 하나도 가볍게 여길 수 없지만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가 이런 이유로 갈라서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앙을 떠나서 이굴라 부부가 모범이 되는 것은 그들 역시 갈라설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끝까지 함께한 것이다. 그것도 유대인 남편의 추방에 로마귀족 출신인 아내가 기꺼이 함께한 것이다. 그래서 고난의 시대를 함께 이겨낸 부부가 되었다. 아무튼 부부는 여러 어려움에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가정도 가족도 건강하게 세워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찾은 곳이 고린도였다. 고린도는 아굴라가 장막제조업자라는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상업의 도시이긴 하지만 타락한 도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 함께 고난의 시기를 견딘 이들 부부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신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섬기던 교회를 떠날 이유가 수도 없이 많이 생긴다. 그렇지만 묵묵히 참고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사람을 통해 교회가 부흥하게 되고,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다.

 

바울과 함께 동역자로 살아간 부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만나게 된 계기가 같은 직종에 종사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전한다(3). 아굴라는 천막제조업자였고, 바울은 천막제조 기술을 가지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선교를 하고 있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한 사람은 추방을 당해 고린도에 왔고, 다른 한 사람은 선교를 위해 고린도를 찾았다. 그런데 같은 직종에 종사하다보니 서로 만나게 된 것이고, 심지어 함께 살게 되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하니’(3a). 유대인 부모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자녀에게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가르쳤다. 그 기술을 가지고 어디 가서든지 경제적인 소득을 마련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 역시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가졌고, 그 기술 덕분에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자비량 선교가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아굴라 부부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만남은 두 사람에게 운명적이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고, 바울은 아굴라 부부를 선교 동역자로 얻게 되었다. 이것이 좋은 만남이고, 또한 만남의 복이다.

 

이후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로마서, 고린도 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 디모데 후서 등에서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언급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특히 로마서에 아굴라 부부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내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16:3,4). 동역자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울 자신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가 자기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이다. 짧은 표현이지만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위해, 주님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바울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를 목숨을 걸고 섬긴 부부였다. 사역자 한 사람도 끝까지 함께 동역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여러 교회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성경에 부부의 이름이 적지 않게 기록된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감동을 주는 부부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민희 집사님이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우리 하경이에게 물었다. ‘민희 언니는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데 너는 어떼?’ 한 동안 말이 없어서 재촉을 했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도 눈물이 나!’ 누군가에게 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준다는 것 쉽지 않는 일이다. 동시에 그만큼 잘 살았다는 뜻이다. 아굴라 부부는 사도바울에게 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준 사람들이다. 바울뿐만 아니라 이방인 여러 교회에게도 그랬다. 이 가정주일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살면서 우리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자. 아내에게 감동을 주는 남편, 남편에게 감동을 주는 아내, 자녀에게 감동을 주는 부모, 부모에게 감동을 주는 자녀가 되자. 교회에서도 지체 상호 간에 감동을 주고, 목회자에게 감동을 주고, 주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성도가 되자. 무엇보다도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에 붙고 눈물로 그 발을 씻겨주었던 여인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그리고 로마군대의 어느 백부장처럼 함께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건강하고 경건한 부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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