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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최고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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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480회 작성일 24-05-0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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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최고의 희망

6:4~9

2024. 5/5. 11:00

어린이날에 대한 유감

어린이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자원이고, 미래에 대한 최고의 희망이다.’(John F. 케네디). 오늘은 이런 어린이날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어린이날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 어린이날은 어린이를 위하는 날이 아니다.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좋은 곳에 데리고 가서 함께 놀아주고, 구경시켜주고, 맛있는 음식 먹여주고, 원하는 선물을 사주는 날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부모에게 무척 힘든 날이 되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상업주의에 물든 대표적인 사례다. 오히려 어린이날은 어른을 위한 날, 부모를 위한 날이다. 어린이에 대한 잘못된 어른들의 생각과 시각을 바로잡는 날이고, ‘미래에 대한 최고의 희망인 자녀를 부모로서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결단하는 날이다. , 부모의 사명을 생각하며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를 다짐하는 날이다.

 

예로부터 세계적으로 청소년 문제는 심각한 골칫거리다. 특히 우리나라가 심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청소년 문제가 없는 나라가 있다어느 나라인지 아는가? 이스라엘이다. 이는 그들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자녀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내용과 방법 때문이다. 그들의 자녀교육의 중심은 철저한 신앙교육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교육이다. 이를 쉐마교육이라고 하는데오늘 본문말씀이 그 정신이다. 흔히 쉐마를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헌장이라고 한다.

 

부모가 주체가 되어 가정에서부터

히브리어로 쉐마(שׁמע)들으라.’는 뜻으로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들으라는 것이다. 쉐마교육의 특징은 교육의 장소는 가정이고, 교육의 주체는 부모. 가정은 인격형성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중요한 교육의 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이라는 만남의 장소를 통해 삶의 과정에 필요한 기초적인 행동양식을 배우고, 인격의 기초를 세운다. 가정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운다. 특히 가정은 믿음의 사람을 키워내는 둥지다. 때문에 쉐마교육은 가정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은 가정을 자녀교육의 1차적인 장소로 생각한 것이다. 특히 그들에게 밥상머리는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는 자리를 넘어 대화와 토론을 하는 작은 학교다

 

이렇게 가정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다보니 자연스럽게 부모의 역할 또한 중요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토라(תורה), 부모를 호림(הורים), 선생님을 모림(מורים)이라고 한다. 이 세 단어는 가르치다.’, ‘교훈하다.’, ‘어떤 모양으로 만들다.’는 뜻의 야라(ירה)라는 단어에서 왔다. 그러니까 토라와 부모와 선생님이란 단어가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소위 언사부일체’(言師父一體)인 셈이다. 이는 부모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준다. 부모는 자녀 인생의 이정표(토라)이자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고, 부모는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신앙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이것을 부모가 가정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힘써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어로 어머니를 ’(אם)이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이란 뜻의 에무나’(אמונה), 진리에메트’(אמת), 신뢰아멘’(אמן)이란 단어가 나왔다. 부모, 특히 어머니에 의해 자녀의 믿음(에무나)과 진리(에메트)와 신뢰(아멘)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부모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 먼저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야만 한다.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라!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 베토벤의 슬픈 대사가 나온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음악을 채워주셨는데, 귀머거리가 되게 하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자신의 음악을 자신만 들을 수 없게 됐다며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에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그의 악보를 정리하는 조수이자 제자인 안나 홀츠가 말한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이에 베토벤이 한 마디 더 한다. ‘내 아버지는 난폭한 술꾼이었어. 하나님이 그런 아버지라면 나는 의절하겠다.’ 기독교 교육학에서 가족관계가 좋지 않거나 부모가 없이 자란 사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배워가고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모와의 관계가 잘못되거나 왜곡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우고 자란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모범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본문도 부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5,6). 먼저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삶으로 자녀에게 먼저 보여주라는 것이다. 부모가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는 것, 말씀을 사랑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모습, 찬양하는 모습,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솔선수범하며 섬기는 모습, 지체인 성도를 사랑하고,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사역자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녀 또한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하라!

본문은 모범을 보이는 것을 넘어 모든 기회, 모든 장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난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7). 먼저 부모가 자녀에게 모범을 보이고, 이어서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이다. 집에서든 길에서든 누워있든 일어나든 모든 장소, 모든 기회에 가르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부지런히 가르치며, 히브리어 본문은 부지런히라는 부사가 없다. 다만 가르치다.’를 뜻하는 샤난’(שָׁנַן)이란 동사가 강조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우리 성경이 이렇게 번역한 것이다. 샤난이란 동사의 어원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하다.’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교육방법은 주로 구전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복학습이 중요했다. 이는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일수록 반복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예리하고 날카롭게 된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강론할 것이며. 이는 쉐마교육 방법의 핵심이다. ‘강론하라.’는 히브리어로 디베르’(דִּבֵּֽר), 이는 이야기를 나눠라.’는 뜻이다. 어떤 규격을 갖춘 강의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talk about’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무의도적인 신앙교육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일상을 교육의 장으로 선용하는 뜻이다. 그래서 교육의 장소는 집안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이고, 교육하는 시간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말씀)교육이 삶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내 집 문설주의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8,9).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보통 4세에서 13세까지 10년 동안 이렇게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을 책임진다. 우리는 수학문제 하나 더 풀고, 영어단어 하나 더 외우도록 닦달하고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물이 들도록 애를 쓴 것이다.

 

다른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하여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잘 가르쳐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갖게 하고, 좋은 배필을 만나 일가를 이루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여기고 있다. 이를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한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전부로 여긴다면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이생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 현명한 부모라면 이생의 것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자녀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곧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이고, 세우고, 일으키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세대가 아닌 다른세대가 탄생하게 된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2:10). 이는 사사시대의 실패원인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말씀으로, 여호수아를 비롯한 가나안 정복세대의 자녀 이야기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부모세대가 다음 세대인 자녀에게 제대로 교육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닌 다른세대가 되었다. 부모의 신앙을 이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부모 세대와 전혀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자녀의 학교나 학원관리는 철저하게 하면서 예배관리는 소홀히 하고, 성적에는 노심초사하면서도 신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니 다른 세대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다음 세대는 말씀에 올곧게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이 아닌 하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배드림이 기쁨이 되고, 사랑이 능력이 되고, 예수님이 자랑이 되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피흘려 사신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성도여야 한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이런 사람의 키워내는 것이 우리 부모 세대의 책임이고, 또한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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