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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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493회 작성일 24-04-21 12:44본문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요20:24~29
2024. 4/21. 11:00
오늘 뭘 배웠소?
류시화 시인의 여행서인「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시인의 자기 경험담이 소개되고 있다. 북인도 바라나시의 한 여인숙에서 묶고 있을 때, 낮에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돌아오면 늙은 여인숙 주인이 묻곤 했다. ‘오늘은 뭘 배웠소?’ 여행하러 온 관광객에게 ‘뭘 구경했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뭘 배웠소?’ 라고 물었다. 이상했지만 못들은 척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인도가 무척 지저분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여인숙 주인은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인도가 무척 지저분하다는 것 배웠다는구나 하고 전했다. 그러면 아이도 덩달아 ‘그래요? 그런 것을 배웠대요?’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다음날도 같은 질문이 계속되었다. ‘오늘은 뭘 배웠소?’ ‘오늘은 인도에 거지가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소?’ ‘오늘은 인도에 소들이 길거리에 많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계속 그러니까 짜증이 나서 어느 날은, ‘오늘은 인도에는 쓸데없는 것을 묻는 사람이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자 여인숙 주인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누가, 어떤 쓸데없는 것을 묻던가요?’ 그는 결코 장난으로 묻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1주일을 하고 나니까 여인숙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오늘은 내가 뭘 배웠지?’ 그리고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 날에는 오늘은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고, 자기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 날에는 오늘은 세상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심지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오늘 나는 침묵의 자유를 배웠다고 했고, 자기 생각에 대해 크게 반대한 사람이 있는 날에는 세상에는 나 말고도 흥분하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것도 배웠다고 했다. 다른 도시에 가서도 ‘스스로’ 묻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인숙 주인이 좋은 스승임을 알았다고 했다.
질문의 중요성
「왜요?」라는 그림책이 있다. 뭐든지 궁금해 하는 아이 ‘릴리’가 주인공인데, 하루 종일 달고 사는 ‘왜요?’ 라는 질문 때문에 아빠엄마는 힘들 때가 많았다. 아마 공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어른으로 산 지 꽤 오래인 지금, 과연 내가 릴리만큼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살아봐서, 겪어봐서, 느껴봐서 아는 것이 있지만 ‘왜’라고 묻기보다 그런 것이겠지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 많음을 깨닫는다. 사실 질문은 열쇠와 같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문을 만난다. 그 문 뒤에는 기회와 경험,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주는 여러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을 열어야 한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좋은 질문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열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왜 이 제품을 만드는가?’ 스티브 잡스의 이 질문에서 아이폰이 탄생했고, 세상을 바꿨다. 질문의 힘이다. ‘아빠, 왜 사진을 보려면 기다려야만 해요?’ 즉석카메라 폴라로이드 창업주 에드윈 랜드는 세 살 딸아이의 이 질문에서 영감을 얻었다. 세상의 모든 혁신이 이렇게 탄생했다. 기존의 방식에 ‘왜?’란 물음표를 던지는 일, 질문은 혁신의 씨앗이다. ‘왜 사과는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질문하자 사과는 뉴턴에게 만유인력의 법칙을 선사했다.
신앙생활에서도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이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주체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신앙도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주체가 될 때 주도적인 신앙을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의 잘못 가운데 하나가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폄하하고 때론 무시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체적으로 신앙생활에서 질문이 외면을 당했고, 의도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질문이 많으면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혹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치부되었다. 대신 질문 없이 맹목적으로 묵묵히 따르는 것이 좋은 신앙, 혹은 성숙한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의 햇수가 많아도 주도적이지 못하고 떠먹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의존적인 신앙으로 전락한 것이다. 얼마 전 세계 61개국에서 〈종교적 성향과 실재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갤럽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종교활동 참여와 별개로 자신이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세계 평균은 62%인데, 한국은 36%에 불과했다. 그리고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34%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고, 특히 20대 젊은이의 무신론자가 51%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비판적인 성찰이나 질문 없이 그저 맹목적인 신앙요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본문이 그 장본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본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질문이 없는 맹목적인 신앙을 갖게 만든 것이다. 특히 29절의 말씀이 그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는 25절에서,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외친 도마의 말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다. 사실 이 말씀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어떤 질문도 없이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는 자를 뜻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는 자’를 뜻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는 자로 오해를 한 것이다. 물론 동료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만 믿겠다는 도마의 태도를 주님께서 꾸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한 믿음보다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말씀중심의 신앙
이와 같이 말씀에 기초한, 곧 말씀중심의 신앙(학)은 요한복음 저자가 줄곧 강조하는 내용이다. 본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a)로 시작을 하고 있다. 본서 전체의 방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과 길을 선포한 것이다. 그것은 곧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장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한 말이 중요하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 또한 본서의 기록 목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20:30,31).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되고, 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에 그렇게 많이 나온 주님의 기적이 본서에서는 7개만 나오고, 그것도 기적(miracle)이 아니라 ‘표적’(sign)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주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기적보다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생각은 바울에게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말씀을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도마가 동료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하고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주장한 것을 주님께서 꾸짖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마에게 주님께 직접 찾아오셔서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자신이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는 불확실한 믿음에 안주하지 않은 덕분에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며 뜨거운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 사실 본문은 분위기에 휩쓸려 대충, 혹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아멘하기보다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진지하게 탐구하여 확인하고, 질문하면서 차근차근 따져 ‘사실 그 자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도마는 불신앙의 대명사가 아니라 오히려 ‘질문하는’ 신앙의 대명사다.
질문하는 신앙
질문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인간만이 질문을 하며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한다. 그냥은 받아들이기 싫다는, 수용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알고 싶다는 인간의지의 강력한 표현이 질문이다. 신앙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면 불신앙이 더욱 커질 것 같지만 질문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 든든한 토대가 되어 올바른 신앙이 뿌리를 내리도록 이끌어준다. 사실 신앙은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는’ 작업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질문이 멈출 때 신앙은 쉽게 맹종과 광신으로 전락한다.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을 위해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습관에 젖은 안이한 신앙생활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질문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라는 뜻인데,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질문이다. 질문은 항상 자기 성찰과 점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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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ca581ztsIP0 1193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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