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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같은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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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504회 작성일 24-04-1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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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같은 사람이 됩시다!

삼상22:1~2

2024. 4/14. 11:00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 

맹자(孟子)에 나온 유명한 말이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은 빈곤에 빠뜨리고, 하는 일마다 혼란스럽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맹자의 고자하 15). 우리가 살면서 여러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실패를 겪는 이유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능력을 쌓게 하여 큰일을 맡기기 위한 하늘의 섭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성경의 인물들에게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다윗이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음은 다윗에겐 고난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꽃길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주님을 믿는 일, 그리고 주님을 위한 일이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작동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윗의 고단한 도피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장이 삼상21장이고, 본문은 그가 도피생활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에 대한 내용이다. 다윗은 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약 10여 년 동안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집요한 추격을 받으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광야로 들어가 아둘람 지역의 어느 동굴을 은신처로 삼고, 그곳에서 숨어 지냈다. 흔히 광야나 굴은 무덤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그가 광야에 있는 아둘람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는 것은 무덤과 같은 인생막장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곳은 막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장소였다. 하나님을 만나는 반전의 장소였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고 이어나가는 힘을 공급받는 장소였다. 그를 지도자로 연단하는 장소였고, 성숙의 과정이었다. 이런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다윗의 도피처, 아둘람 동굴

이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다윗에게 아둘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었고, 새로운 기회의 자리였다. 그가 아둘람 굴에 숨어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가장 먼저 그의 부모와 형제가 찾아왔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세 부류였다. 우선 그들은 환난 당한 자들이었다. 사울의 폭정에 항거하다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 사람들이다. 다음은 빚진 자들이었다. 여러 이유로 빚에 시달리다 재산을 다 빼앗기고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원통하다는 것은 마음에 억울함과 한 맺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400명가량 되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전혀 쓸모없는 무가치한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쫓기고 있는 다윗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짐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다윗은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갈 데 없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거두어 기꺼이 그들과 함께 했다. 비록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이렇게 다윗을 중심으로 아둘람 굴에서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참으로 미미했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도 그렇고, 이들을 지도자가 된 다윗 역시 쫓기는 몸이라 활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둘람의 공동체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아둘람 공동체는 다윗에 대한 믿음 하나로 모이고, 결속된 다윗중심의 공동체였다. 다윗은 선별하여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았다. 아둘람 공동체에 가입하는 데는 다윗에 대한 신뢰 외에 다른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았다. 그외 다른 필요조건은 없다. 둘째, 아둘람의 공동체는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였다.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였다. 다윗은 그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아둘람 동굴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찬양이 울려 퍼지고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충만한 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어두운 아둘람 동굴이 치유와 회복의 장소, 부활의 장소로 바뀌게 되었다. 셋째, 아둘람의 공동체는 변화의 공동체였다. 아둘람에 모인 사람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윗과 함께 하면서 나라의 비전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탁월한 다윗의 용사로 변화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나중에 다윗왕국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지도자가 되었다. 다윗과 다윗왕국에서 가장 용맹한 3인의 용사가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이 아둘람 공동체 출신이었다. 이쯤 되면 아둘람이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잠시 머문 피난(혹은 난민)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둘람 공동체와 같은 교회

아둘람은 피난처’, 혹은 보호처란 뜻이다. 이는 교회의 다른 이름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고 보호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둘람 공동체를 교회의 좋은 그림자, 또는 교회가 지녀야할 표상이라고 한다. 아둘람 공동체에 가입하는 데는 다윗에 대한 신뢰 외에 다른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았던 것처럼 교회도 그렇다. 오직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의 모임이 교회다. 그외 다른 필요조건은 없다. 아둘람 공동체로 모여든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고, 경제적으로 파산한 사람들, 마음의 쓴 뿌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상처입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문제가 많은 공동체였다. 그런데 다윗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교회도 아둘람 공동체처럼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의 모임이다. 사연만큼이나 문제가 많은 곳이 교회다. 그러니 교회도 위로와 격려의 은혜가 넘치는, 그래서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다윗이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서로 돌아보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랑해야 한다.


 

아둘람 동굴에 모인 사람들은 당시 주류사회에 들지 못한 외부인’(outsider)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루저(loser)였다. 이런 그들이 다윗과 함께 하면서 나라의 비전을 공유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탁월한 다윗의 용사로 변화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성도도 대부분이 당시 사회에서 루저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 성도의 사회적 신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2:26). 이 정도면 교회를 신약판 아둘람 공동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세상의 못나고 미련한 사람을 통해 잘나고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고, 또한 세상의 약한 사람을 통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세상의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통해 있는 자들을 폐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거듭나도록 하셨다. 교회도 함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이었다. 열두 명의 변변치 못한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주시고,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삼으셨다. 아둘람 공동체는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다. 교회는 환난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섬기고 위로하고 회복시키며,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물과 같은 사람

히브리어로 선물을 샤하드(שחד)라고 하는데, 뇌물도 같은 단어다. 그렇다면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동기의 차이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주었느냐의 차이다. , 상대방을 위해 준 것이라면 선물이지만, 나를 위해 준 것은 뇌물이 된다. 이는 단순히 선물뿐만 아니라 헌신도, 섬김도, 심지어는 믿음도 마찬가지다. 그 동기와 방향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사람도 선물과 같은 사람이 있고, 뇌물과 같은 사람이 있다. 상대방을 위해, 특히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는 사람은 선물과 같은 사람이다. 선물에는 남다른 특징이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 그러므로 선물이 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기쁘고,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다윗은 선물과 같은 사람이다. 자신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자신을 찾아온 여러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주었고, 함께 하면서 그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훌륭한 용사로 변화시켰다. 그러니 다윗은 그들에게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그들에게 선물이 되어주니까 그들 역시 다윗에게 선물이 되었다. 다윗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중심, 더 나아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타인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면 NIBC(Not I but Christ)가 된다.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되고, 그 은혜가 흘러넘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 받은 은혜가, 사랑이, 은사가 이웃에게 선물이 된다. 그리하여 선물과 같은 삶, 선물과 같은 사람이 된다. 마더 테레사 이야기다. 캘커타 빈민촌에 굶는다는 아이가 있어 찾아갔다. 먹을 것을 주었다. ‘이거 먹어라.’ ‘잠깐만요.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요.’ 얼마 후 아이가 돌아왔다. ‘어디 갔었니?’ ‘나보다 더 배고픈 친구가 있어서요.’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이다. 가난하지만, 이 아이는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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