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고, 모이고, 또 모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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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912회 작성일 24-04-07 13:34본문
모이고, 모이고, 또 모입시다!
히10:22~25
2024. 4/7. 11:00
격려의 공동체, 교회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말한다. 신앙생활도 만만치 않다. 믿는 사람이 모인 곳이니까 교회는 천국인줄 알았는데,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 때문에 실망을 하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다. 사실 신앙생활에는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험과 아픔도 있다. 자칫하면 상처받고 실족하기 쉬운 곳이 교회다. 그것은 교회가 노아의 방주라서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를 사도라 하고, 사도의 제자를 교부라고 한다.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있는데, 그는 교회를 노아의 ‘방주’라고 했다.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로 세상을 구한 것처럼 마지막 날에 교회를 통해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과 많은 동물이 타고 있었다. 거기에는 하늘로 향한 작은 창 하나만 있었다. 그런 곳에서 노아와 동물들이 1년 이상 살았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공기가 탁하고, 시끄럽고, 답답하고, 혼잡했겠는가? 교회도 이와 같다. 하늘로 향한 창을 하나만 두고 각양의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다. 그러니 냄새도 나고, 시끄럽고, 답답하고 혼잡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교회를 떠날 수 없다. 방주를 탈출한 순간 수장(水葬)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 안에서 견뎌야한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 서로 ‘격려’다. 서로 돌아보면서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본문은 믿음을 가진 후 고난에 직면해 있었던 1세기의 성도를 격려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래서 저자는 성도에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 격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로 상황은 달라도 1세기보다 훨씬 복잡한 21세기를 사는 성도에게도 동일한 격려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낙심할 이유가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서로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본문에는 4가지 ‘청유형’(Let us~)의 문장을 통해 서로 격려하며 권면해야 할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네 개 청유형 문장을 살펴보면, 우선 세 개는 ‘믿음’(22)과 ‘소망’(23)과 ‘사랑’(24)을 강조하고, 네 번째는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원천으로서 성도의 여러 경건활동을 위한 ‘모임’(25)을 강조한다.
첫째,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Let us go to God with faith).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철저히 제한되어 있었다. 성전이 있고, 성전의 안뜰에는 제사자와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 제사장을 돕는 레위인만 들어갈 수 있었고, 바깥뜰도 유대인 남자와 여자, 이방인의 뜰로 구분이 되어 해당된 사람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성전도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었고, 성소는 담당 제사장만 직무를 위해 출입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1년 한 번 대(大)속죄일에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구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신 것이다. 이를 설명한 내용이 19~20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주님께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 들어갈 담력(자유)을 얻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이제 그 길이 열렸으니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서로 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든 신앙생활 속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첫 번째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신앙생활을 격려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자칫 간섭하는 것으로, 참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믿음의 공동체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도록 권하고 격려하는 일이 필요하다.
둘째, 믿는바 ‘소망’을 굳게 붙잡자(Let us hold unswervingly to the hope).
초대교회 시절에 성도는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소유와 사회적 지위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여 사회적인 보호도 받지 못했다. 당시에 믿는다는 것은 사회적 사망선고와 같았다(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선 그렇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는 얼어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보니 이를 견디지 못하여 중도에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본문은 이런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믿는 도리의 소망’을 확고하게 붙잡도록 서로 격려하라고 한 것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자,’(23). 여기서 믿는 도리의 소망은 부르심의 소망(엡1:18), 복음의 소망(골1:23), 구원의 소망(살전5:8), 영생의 소망(딛1:2), 좋은 소망(살후2:16), 복스러운 소망(딛2:13), 하늘에 쌓아둔 소망(골1:5)이다. 이와 같은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붙잡도록 서로 격려하라는 것이다. 즉, 확고한 소망으로 위기를 잘 견뎌나가자는 것이다.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가 있다. 성도는 힘들고 어려울수록 가슴에 소망의 불이 더 뜨겁게 타오르게 해야 한다. 고난이 클수록 영광에 대한 소망이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사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채찍질과 심문과 온갖 곤욕을 당하면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소개한 여러 소망, 곧 믿는 도리의 소망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틀림없는 분’(미쁘신 분)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소망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이 약속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살자.
셋째,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Let us.....to love and good works).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주로 충격적인 사건과 사고 등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참상과 여러 재난소식,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와 같은 사건사고, 특히 선거의 계절이 되다보니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혐오와 독설로 편과 적을 동시에 만드는 선동 메시지가 나무하다. 이런 부정적인 흐름에 노출될수록 우리도 흔들리고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세의 중요한 특징으로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셨다(마24:12). 사랑이 식어버린 차가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이 곧 24절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런 세상풍조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역행하라는 것이다. 세상풍조에 편승하여 떠내려가지 말고 거슬러 올라가라는 것이다.
자연이 때를 따라 아름다운 이유는 좋은 일만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재난과 재해도 많고, 사건사고도 많아 벅찬 상황이 계속된다. 그럼에도 야생의 생명력은 계속해서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폭우로 깎여 나간 산자락에 시간이 지나면 수많은 생명이 자라나고, 화마가 시커멓게 삼켜버린 나무들의 밑둥에서 새로운 움이 돋아 산을 다시 푸르게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고난과 박해 시기의 성도도 그랬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한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이웃에게 선하고 친절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추구하며 마음과 뜻을 모아 수고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밝히는 빛이 되고, 썩어갈수록 부패를 막는 한줌의 소금이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것이 곧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 차가운 세상일수록 훈훈한 소식이 필요하고, 흉흉할수록 감동적인 좋은 소식이 필요하다. 따뜻한 섬김과 감동적인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 미담의 주인공이 되자.
넷째,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Let us meet together all the more).
앞에서 소개한대로 세 개의 청유형 문장으로 된 격려내용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믿음으로’하나님께 나아가고, 믿는바 ‘소망을’ 굳게 붙잡고, ‘사랑으로’ 서로 돌아보며 섬기는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특히 바울에게 있어선 이상적인 덕목이었다. 그래서 바울서신에 이상적인 성도상(像), 혹은 이상적인 교회상(像)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본서에도 이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생각이 초대교회가 전반적으로 지향했던 같다. 아무튼 신앙생활의 상황과 환경이 힘들수록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믿는바 소망을 굳게 붙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이 모이고, 모이고, 또 모이는데있다. 그래서 네 번째로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한 것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5).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여러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영향력있는 교회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잘 모이는데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했고, 또한 수시로 각 가정에 모여 떡을 떼며 교제했다. 그리고 핍박으로 각 지역으로 흩어졌을 때도 그들은 모임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모인 곳이 곧 교회가 되었다. 하여간 예배를 위해서건,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위해서건, 또한 교제와 섬김을 위해서건 그들은 열심히 부지런히 모였다. 사실 신앙생활은 혼자하면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서로 격려하여 모이기에 힘써 함께하면 이 일은 쉽고 또 즐거운 일이 된다. 심리학자들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다고 말한다. 서점을 가보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가지’ 습관, 이런 유형의 책을 적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자녀에게 어린 시절에 몇 가지 중요한 습관을 길러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 교회 가는 습관,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절약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 이웃을 섬기고 배려하는 습관 등등. 이런 좋은 습관을 길러주면 자녀교육은 성공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채워진 성공적인 신앙생활도 습관이 중요하다. 그것은 ‘모이는’ 습관이다. 잘 모이고, 기회있는 대로 모이고, 부지런히 모이는, 그래서 모이고, 모이고, 또 모이는 것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fMgLQvP4rEE 1124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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