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시선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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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29회 작성일 24-02-11 12:29본문
신앙은 시선의 싸움이다!
신20:1~9
2024. 2/11. 11:00
바라봄의 법칙
한 젊은 병사와 결혼해서 사막에서 살게 된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사막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친정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엄마,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너무도 싫어요.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끔찍한 곳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모래와 뜨거운 태양뿐이에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다음과 같은 아주 짧은 답장이 왔다. ‘사랑하는 딸아,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어머니가 보내준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녀는 진흙이 아닌 별을 찾기로 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사막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좋은 책을 쓰기까지 했다. 끔찍한 사막이 행복한 연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유는 사막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막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에 따라 변한다. 자꾸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왜 화를 내는지를 알아보았더니 화가 나는 기사나 사건만 보고 있었다. 화가 나는 것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을 항상 화를 내게 만든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보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긍정적인 것을 보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나쁜 것만 보고 악한 것만 보면 나쁜 사람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무엇을 자주 보고, 많이 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보는 것이 미래다.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 사람은 보는 대로 가게 된다. 서쪽을 보면 서쪽으로 가고, 동쪽을 보면 동쪽으로 간다. 밝은 곳을 보면 밝은 곳에 가있고, 어두운 곳을 보면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이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를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똑 같은 것을 보아도 어디를 보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해석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고 평가가 달라진다. 흔히 반쯤 채워진 물 잔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잔이나 남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반잔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같은 물 잔인데 이렇게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비어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남아 있는 물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에 따라 해석과 의미, 평가가 다른 것은 보는 것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석과 의미, 평가가 달라지고, 더 나아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바라보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따라간다. 즉, 보는 것에 마음이 따라간다. 이것이 소위 ‘보는 것의 마력’이다. 아무리 강자라도 보는 것의 마력 앞에서 마음을 빼앗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할 때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1).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한 말씀이다. 승리하는 비결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대적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한 마디로 시선관리다. 적의 숫자가 몇 배나 많고, 무기도 엄청나고, 힘 또한 굉장히 강하다할지라도, 이런 것들을 전혀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여기서 이 말씀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40년 전 출애굽 1세대, 곧 부모의 세대가 그들이 싸워야 할 가나안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믿음을 잃어버렸다. 이처럼 두려움에 떨며 믿음을 잃어버린 결과,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결국 출애굽 1세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멸망한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아닌 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키가 장대한 아낙 자손들, 난공불락의 성과 성벽들,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용맹한 가나안 원주민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출애굽 2세대에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런 명령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싸움이기에 대적을 보지 말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결국은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 곧 무엇을 보고, 누구를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의 시선을 가지라는 것이다.
신앙은 시선의 싸움이다.
신앙은 시선의 싸움이다. 누구를 보고,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눈 바꾸는 훈련이라고 한다. 세상과 그 영화만 바라보던 눈을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두는 훈련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하던 눈을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하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시선을 예수님께 두고,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 사람과 직면하는 문제와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신앙생활이다. 이 시선을 놓치는 순간 신앙생활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도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낸 다음 무리를 흩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홀로 빈들에 남아 기도하셨다. 그때 바다 가운데서 돌풍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급히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유령이 나타났다고 두려워하며 더욱 소리를 질렀다. 주님께서 자신을 밝히며 안심시켰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때 베드로 소리쳤다. ‘만약 주님이시라면 저를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은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베드로도 물 위로 몇 발자국을 걸었으나 곧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가 소리쳤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29~31).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졌다. 이유는 ‘시선이탈’이다. 풍랑을 밟고 계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데, 바람과 파도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사실 물위에 서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무섭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이 때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그 파도를 밟고 서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 물에 빠지는 자연법칙을 이기고, 초자연적인 법칙을 적용받아 살게 되는 것이다. 나를 덮치고 있는 풍랑, 그것을 밟고 서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시선고정’이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 이유는 시선이탈이었다.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형편에 시선을 두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시선고정이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그의 시선을 고정했기에 거인 골리앗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라!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수피즘(ṣūfism)에서 수도승들은 ‘수피춤’을 춘다고 한다. 신을 향한 소통이자 종교의식인 이 춤은 긴 치마를 입은 수도승이 빙글빙글 돌며 추는 춤이다. 오른손은 하늘로, 왼손은 땅으로 향하게 하고, 한 방향으로 계속 돌며 추는데, 하늘을 가리키는 손은 신을 영접하고, 땅으로 뻗은 손은 신의 평화, 사랑, 관용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수도승은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세 시간 이상 회전하며 춤을 춘다. 단순한 행동 같지만 사실 쉽지 않는 일이다. 보통 조금만 몸을 회전시켜도 어지러운데 이들은 세 시간 이상을 회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도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며 춤을 춘다. 어떻게 세 시간 이상을 회전할 수 있을까? 그들을 자세히 보면,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키고 절대 곁눈질을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선을 고정하고 곁눈질 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춤을 오랫동안 출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이다.
누구든지 곁눈질을 하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오물을 밟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부딪치기도 한다. 가야할 길과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똑 바로 걷고, 똑 바로 가기 위해선, 똑 바로 살기 위해선 곁눈질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올바른 신앙생활 역시 시선을 고정하고 곁눈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누구에게 고정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저자가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만 고정시키는 것,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것으로 향하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신앙이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고 곁눈질하지 않는다면 베드로처럼 물위에서 물속으로 빠져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처럼 자기연민에 빼져 탈진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다윗처럼 골리앗과 같은 강력한 적도 능히 넘어설 수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그 비결로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시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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