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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가 본 ‘도가니’ 1퍼센트에 대한 99퍼센트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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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810회 작성일 11-10-3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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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가 본 ‘도가니’ 1%에 대한 99%의 분노

“99퍼센트가 느끼는 분노라면, 그 분노는 정의다.”

▶김상욱의 무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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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 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대한 분노로 대한민국이 들끓고 있다. <도가니>가 소설이었을 때, 분명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도가니>가 영화로 개봉되자 사람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각종 인터넷 매체들은 분노의 이유를 분석하기에 바쁘지만, ‘이걸 보고도 분노하지 않으면 그게 인간이냐?’는 버럭 호통 하나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하지만 이런 분노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도가니>에 나오는 장애아동 성폭력의 생생한 장면과 진실을 은폐하는 이 사회의 추악한 뒷거래는 분노를 자아내도록 정교하게 고안된 것이다. 필자는 영화 속 피해 아동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가졌기 때문에 분노를 넘어 구토증마저 느꼈다. 하지만 이 분노는 잘 만들어진 각본의 결과인 것만큼이나 쉽게 없어질 성질을 가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 끔찍한 사건의 방조자인 우리가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 단지 영화티켓 한 장 사고 두 시간 정도 앉아서 씩씩거리면 되는 걸까?

 

분노하는 것은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닐 때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의 실정에 분노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가문이 멸족 당했다는 불행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특히나 합리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분노하는 것은 성공에 불리한 작용을 할 뿐이다. 하지만 진화론에 따르면 이런 행동이 존재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터.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아버지 간디는 젊었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변호사 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남아공은 강력한 인종분리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변호사인 간디도 유색인이라는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간디는 기차에서 1등석 표를 샀음에도 3등석으로 옮기라는 백인의 명령에 거부하다 기차에서 내던져진다. 또, 마차에서 백인 승객을 위해 내려서 걸으라는 말에 거부하다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이때 간디가 느낀 분노는 훗날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이같이 분노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이점이 있다. <도가니>의 분노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강력한 동기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분노는 약자의 것, 분노를 풀어라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면 시기, 절망, 미움, 두려움 등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독이다. 이러한 독들을 한데 묶어 ‘화’라 한다. 따라서 화를 극복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화내는 것을 분노라 한다. 이렇게 보면 분노는 표출하기보다 풀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자기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사실 많은 종교들이 화를 풀라고 조언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종교도 있고, 화를 극복하라는 종교도 있다. 그렇다면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드라마 속 직장의 모습을 보면 주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화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을 보면 분노는 강한 사람의 특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로 강한 사람은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웬만한 일로는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 까닭이 없으며, 어떤 어려움도 스스로 헤쳐 나갈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의 빵을 빼앗으면 그들이 크게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의 빵을 하나 먹었다고 당신은 분노하지는 않을 터다.

 

분노가 약자들의 것이라면 <도가니>를 보고 터져 나오는 우리의 분노도 역시 약자이기에 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사실 당신이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가니>를 보고도 분노를 덜 느낄 수 있다. 원한다면 복수하는 일은 쉬우니까.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느낀 분노는 일종의 무기력감에서 기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자본가-형사-검사-판사-변호사로 이어지는 그들만의 철옹성을 보며 약자의 비애를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인터넷에서 떠드는 일뿐일지도 모르니까. 결국 <도가니>를 보고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분노를 자제해야 할까?

 

하지만, 다시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 한 권이 서점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해설 부분을 떼어놓으면 43페이지에 불과한 팸플릿 같은 책에 관심이 모이는 이유가 뭘까? 책의 저자인 에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독일군에 체포된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강제수용소에서 사형까지 선고받지만,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에셀은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지내며 인권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왔다. 이제 아흔세 살 된 저자가 사회에 던지는 마지막 주문은 ‘분노하라’는 것이다. 에셀은 호소한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놓인 엄청난 격차, 여전히 존재하는 수많은 인권문제에 분노하라고. 인권문제에는 대량 학살과 기아, 종교적 차별, 정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억압과 반인륜적 범죄가 포함된다. 에셀은 더 나아가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상화된 대중의 망각, 지나친 경쟁만을 비전으로 제시하는 대중언론 매체에 맞서는 평화적 봉기”를 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사실 지난 50여 년 동안 인류 문명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 왔다. 여기에는 정보 혁명만이 아니라 식량 및 자원의 발전도 포함된다. 탐사 기술의 발전으로 석유는 고갈되지 않고 있으며, 식량 생산의 효율은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생명공학은 더 놀라운 발전의 미래를 약속해 주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제는 풍전등화에 놓여 있고, 개인의 삶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다. 대체 우리가 만들어낸 그 많은 돈은 다 어디 갔는가? 에셀은 답한다. 국가의 최고 영역까지 장악한 돈의 권력이 전에 없이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하기 때문이라고. 은행과 대기업은 자신의 이익 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에만 관심을 보일 뿐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에셀의 책 <분노하라>는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는 1퍼센트에 대항하는 99퍼센트의 분노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분노는 약자의 것이다. 약자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분노뿐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해야 할 분노라면 표출하기보다 다스리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99퍼센트가 느끼는 분노라면, 그 분노는 정의다. <도가니>를 보고 우리가 느낀 분노는 변태성욕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이것은 1퍼센트에 대한 99퍼센트의 분노다. 이 분노를 조직하여 장애인 차별 문제의 해결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살 만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도가니>에 나오는 인권 운동가 서유진의 대사로 글을 맺는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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