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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자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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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900회 작성일 24-07-1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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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자의 소원

16:19~31

2024. 7/14. 11:00(성령강림 아홉째 주일)

부자와 거지 나사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들 중에 사람의 실명이 나오는 비유가 있다. 본문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부자의 이름은 없고, 평생 구걸하는 삶을 살다가 부잣집 문 앞에서 죽은 나사로라는 거지 이름만 나온다.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온 이름이다. 그런데 그는 이름이 무색하게 병들고 지친 몸으로 부잣집 대문 앞에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거지신세였다. 하나님의 도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죽어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이 나사로였는지 모르겠다. 비록 살아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했으나 죽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국엘 간 것이다. 반면에 날마다 호의호식하던 부자도 죽었다. 그는 이 세상을 부자로 살면서 온갖 것을 다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죽어선 지옥을 가게 되었고, 살아서 듣도 보도 못했던 고통을 받게 되었다. 비유에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온갖 것을 다 누려도 천국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빠진 사람의 비참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지 모르겠다. 혹은 비록 거지였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신 사람과 부자였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지 못한 사람의 최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름은 없어도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과 이름은 있었으나 비참하게 살았던 이 세상에서 너무나 대조적으로 살았던 두 사람이다. 그런데 둘 다 죽었다. 부자도 거지도 죽음 앞에선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죽은 다음이다. 죽고 나니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불꽃 가운데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본문은 그 광경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성경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지옥의 생생한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지옥에 간 사람)이 말을 하는 장면이다. 이는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과 도전이 되는 내용이다. ,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의 간절한 소원

나사로의 안식과 자신의 고통을 알아차린 부자는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요청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7,28). 참으로 뜻밖의 외침이다. 부자는 평생 자기 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기 집 문 밖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질병에 시달리다 죽은 나사로를 알고도 모르는 채 하고 살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역전되자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리고 있는 나사로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어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형제들은 자기처럼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증거하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사람은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계속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을 섬기거나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구하는 것이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죽은 부자가 굳이 아브라함에게 요청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지옥의 소식을 알렸을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 고통을 받는 중에 이런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속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단절이다. 완전히 끝이다. 사단이 죽은 자를 매개로 살아있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건강을 빌고, 행복을 빌고, 부귀영화를 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 것은 이미 말을 했고, 그 내용도 문제다. 이런 것들이 죽은 사람의 관심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의 요청처럼 죽은 사람의 관심은 딱 하나다.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기처럼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는 것이다. , 예수 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믿고 죽은 사람이나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의 공통관심사다. 살아있을 때는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죽고 나서 고통을 당하고 보니 아직 기회가 있는 자들은 이곳에 와서는 안 되겠다싶어 이런 요청을 한 것이다. 우리 역시 본문을 통해 죽은 이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지옥이 어떤 곳이기에 지옥에 간 부자가 이런 요청을 한 것일까? 본문을 통해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알 수가 있다. 지옥과 천국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옥과 천국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본문이 증거하고 있다(22,23). 우선, 지옥은 불꽃 가운데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며 괴로워하는 곳이다(23,24). 다음으로, 지옥은 최소한의 자비도 차단된 곳이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통한 물 한 방울의 자비를 요청했다(24).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러한 그의 요청을 단호하게 물리쳤다(25,26). 또한, 지옥은 어떤 간구도 차단이 된 곳이다. 자신을 위한 물 한방에 대한 자비가 거절되자 그는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서 그들로 자신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를 하지만 이 또한 거절을 당했다(30,31). 지옥은 어떤 자비도 어떤 간구도 완전히 차단이 된 곳이란 뜻이다.

 

끝으로, 지옥이란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모든 기회가 상실된 곳이다. 아직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가 있고,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그런데 모든 기회가 사라지고 아무 것도 소용이 없는 곳이 있다. 바로 지옥이다. 이 부자가 이런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그곳에서 후회를 하고, 자비를 요청하고, 형제들을 위해 간구를 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세상에 살 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는데, 죽고 나니,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나니 아무 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어쩌면 이 부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복인 이유다.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도 시도할 수도 있고, 또한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요청도 요구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한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이다. 특히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무언가를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섬길 수가 있고, 더욱 열심히 신실하게 잘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회를 잘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소원

어느 목사님이 한 여고생을 전도했다일찍 어머니가 죽었기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큰 학생이었다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에 대해 얘기하자 학생이 물었다. ‘우리 엄마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그러면 지옥에 갔나요?’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믿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그랬겠지.’ 그러자 그 학생이 눈물 흘리며 말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가신 지옥에 가겠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학생에게 본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만일 어머니가 지옥에 갔다하더라도 그 지옥에서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아니? 사랑하는 네가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곳에 오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란다.’

 

이 학생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다이런 가슴 아픈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가족전도다. 그러면 가족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일이 없이 모두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니까 지옥을 가는 것이고, 지옥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까 아직 기회가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만은 그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지옥에 간 부자의 소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지옥에 간 부자만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이런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계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우리를 통해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삼고 살아가기 바란다. 우리와 우리 교회 때문에 지옥이 텅텅 비워지고, 사단이 할 일이 없도록 만들자. 그 방법이 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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