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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地) 탐방5. ‘스코틀랜드 개혁의 선구자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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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5,631회 작성일 15-07-0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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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地) 탐방5. ‘스코틀랜드 개혁의 선구자들’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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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독일이나 스위스, 영국)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게 일어났다. 그것은 그들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당시 그들은 잉글랜드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고, 이를 막아내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기 보위(保衛)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는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가톨릭의 우산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들에게도 점차 신교사상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롤라드파(Lollards)와 후스파의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간간히 스며드는 신교사상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독일 등지에 유학 갔던 사람들에 의해 루터 및 다른 개혁자의 저서들이 유입되어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갔다.

 

이렇게 되자 의회는 1525년 7월 대륙으로부터의 신교서적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이를 제지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1526년 이후에는 틴데일(Tyndale)이 영역(英譯)한 신약성경이 글래스고 지방에 유포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를 막으려는 세력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교를 따르는 사람의 숫자는 증가해갔고, 왕실권력의 팽창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상실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신교사상은 거세게 번져갔다. 이런 와중에 1528년 최초의 순교자가 생겨났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개혁운동의 선구자 패트릭 해밀톤이다. 우리는 그가 순교를 당했던 성 앤드류스 대학교를 방문하고, 본관에 있는 성 샐베이터 교회(St. Salvator’s Church)에서 잠시 그를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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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위 부분은 해밀톤이 순교한 자리에 나타난 그의 얼굴 모습,

아래는 성 샐베이터 교회의 실내,

그리고 우측은 그의 순교 장면이다.

 

해밀톤은 명문가문 출신에 재능 있는 젊은이로 파리 루뱅(Louvain)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1524년 10월 성 앤드류스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강의하다가 당시 악명 높았던 성 앤드류스의 대주교 제임스 비튼에게 소환 당하자 곧 독일로 망명하였다. 그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신교신앙을 표방하는 최초의 교리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1527년 그는 위험이 있었으나 비장한 각오로 귀국하여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후일 존 낙스는 이런 그의 활동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의 마음에 심기운 참된 빛의 광채는 그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공적으로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단지 몇 개월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ph1.jpg  

위 사진은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세긴 명판이고,

아래는 앤드류스 성에서 본 샐베이터 교회 모습이다.

 

비튼은 그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1528년 2월 27일 그를 체포하였고, 이틀 후 2월 29일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였다(성 앤드류스 대학교의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 그는 6시간 동안 불과 연기 가운데서 고통당하며 죽어갔다. 후일 낙스는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사」에서 ‘그를 태우는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는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여러 미담을 남겼는데, 특히 마지막 순간 스데반처럼 기도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의 모교 성 앤드류스의 대학은 본관(성 샐베이터 교회) 옆 명판에 그의 이름 머릿 글자를 따라 ‘PH’라고 적어 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비록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으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개혁정신을 감염시켰다. 무엇보다도 장차 낙스의 개혁을 성공시키는데 토대를 놓은 선구자가 되었다.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그 밀알이 되어주셨던 것처럼 해밀턴 역시 조국의 종교개혁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진들의 피 값으로 세워진 스코틀랜드의 교회들이 오늘날 와서 텅텅 비어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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