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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이야기(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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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티끌 댓글 0건 조회 12,133회 작성일 12-04-06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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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국경을 무사히 통과했다. 물론 일행 몇 사람은 가방의 내용물을 모두 열어보여야 하는 불편을 겪었으나 별 일은 없었다. 단순 관광객도 아닌 순례자들의 가방까지 풀어헤치고 사소한 것까지 시비를 거는 저들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할 수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지중해로 밀어 넣어 버리고 싶다는 아랍연합국들 사이에 끼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차를 타고 다시 요르단 국경으로 향했다. 요르단 국경은 쉽게 통과했고, 그곳에서 요르단 지역을 안내할 새로운 안내인을 만났다. 요르단 현지교회를 섬기고 있는 여성 목회자였다. 그녀는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다음 요르단 순례일정과 이 지역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는데 발음도 정확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 열정과 자신감이 넘쳤다. 보기에 참 좋았다.

 

요르단은 남한보다 작고 국토의 80%는 반사막지대다. 중동에서 가깝지만 석유가 나지 않고, 가진 자원이 별로 없으며, 인구 70% 정도가 팔레스타인 유민이다(걸프만 전쟁 후 이라크 유민도 많고, 지금은 시리아인도 많이 온다고 함). 이라크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다 보니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실제로 치안이 잘되어 있는 안전한 나라이고, 친 서방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요르단은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동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북쪽으로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요르단 순례는 솔로몬 시대부터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지역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아카바 만(灣)에 위치한 ‘에시온게벨’(아카바)에서부터 시작되었다(지금은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 왕의 대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셀라’(헬라어로는 ‘페트라’ 바위란 뜻)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길은 험준한 바위산 사이로 뻗어 있었는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있는 검은 띠를 볼 수 있었다. 이는 기름띠로 ‘락오일’(Rock oil)이라고 했다(석유가 나지 않는 요르단으로서는 개발하고 싶어도 경제성 때문에 포기하고 있다고 함). 그리고 차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의 촬영지 ‘와디람’(Wadi Ram)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기며 마음에 담았다.

 


 바위 사이에 있는 기름띠 '락오일'을 가리키고 있다.

 

 


와디람(마른 시내)은 이 지역 사막 중 가장 경관이 빼어난 지역으로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며칠 씩 머물며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셀라에 도착했다. 먼저 짐을 숙소로 옮긴 다음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모세의 우물’(Aen Musa)을 방문하고, 다음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페트라로 향했다. ‘모세의 계곡’(Wadi Musa)이라고 불리는 계곡을 따라 높은 절벽들로 이루어진 협곡을 통과하자 고대도시 페트라가 나왔다. 페트라는 전체가 붉은 사암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바티안(아랍계 유목민으로 추정)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이 암석지대에 도시를 건설했다. 바위는 사암이고, 그들은 그 연무른 사암을 쪼고 깎아 숱한 건축물을 남겼다. 사방이 절벽인 신비의 천연요새로, 마치 지하왕국을 연상시켰다. 높이 2~300m의 바위산과 협곡을 지나 마주한 것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잃어버린 성배를 찾아서」의 촬영지로 유명한 페트라의 상징 ‘알 카즈네(보물창고)’다. 그곳을 지나면 바위산에 숨어 있던 놀라운 규모의 고대도시 페트라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었어도 이곳의 주인이었던 호르족과 에돔족, 그리고 가장 번영을 누렸던 나바티안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고 한 시편의 말씀을 절감한다.

 

 

 '페트라'로 들어가는 길, 바위틈에서도 자라고 있는 무화과나무의 생명력이 대단하다.

 

 

좁은 길을 2킬로 쯤 걸어가다 보면 높이 2~300미터 바위산의 대 협곡(시크) 사이로 핑크빛  '알 카즈네'가  보인다.

(여기에서도 양쪽 바위 암벽 사이로 검은 띠가 선명하게 보임)

 

 

페트라의 입구에 있는 페트라의 상징  '알 카즈네'(보물창고)

여섯 개의 기둥으로 된 헬레니즘 양식의 건축물로 페트라 유적 중 최고 걸작

 

 


'페트라'는 요르단의 국보 제 1호로 아직도 전체 1/3 밖에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며

일부 지역은 창을 달고 사람이 거주하기도 한다.

 

 

 

로마식 원형 극장, 바위산 자체를 그대로 깎아 만든 것으로 약 3천-6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르며 극장 왼쪽으로는 왕궁, 신전, 공공 목욕탕 등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다.

 

차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알려진 사해를 향해 가파르게 내려갔다. 갑자기 해발 약 950m에서 해저(약350~400m)로 내려가니까 기온 차이는 물론 귀가 멍했다. 아무튼 사해가 보이기 시작하니 주변 평지(모압평지)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의 푸른빛이 더욱 푸르게 보였다. 사해 언저리에서 차가 잠시 멈췄는데, 그곳이 옛 소돔지역이란다. 운동도 할 겸 차에서 내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폐허가 된 땅을 걷다가 다시 차에 올라 롯의 동굴을 방문했다. 그리고 사해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절벽 위에서 미련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은 듯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 모습의 커다란 돌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성경에서 말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롯의 아내였다. 그 길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도착했을 때 비가 왔다. 우리에겐 달갑지 않는 것이지만 이들에겐 단비다. 그래서 비가 오면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일부러 비를 맞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귀한 비가 겨우 먼지가 일지 않을 만큼 오고 그쳤다. 이처럼 물이 귀하니 화장실 사용은 물론 식당에서도 물 값을 별도로 받은 것이다(이는 이집트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중요한 여행 수칙 중 하나가 안내인이 제공한 물만 마시고 임의로 현지의 물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현지 물은 석회질이 많아 순례객이 마시면 100% 배탈이 나기 때문이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식사 때마다 절임 올리브 열매(올리브가 석회를 희석 작용함) 두 세개 씩을 꼭 먹도록 권했다(난 입맛이 맞지 않아 입에 넣었다가도 금방 뱉어버리곤 했다).

 

 

 사해, 바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이스라엘 땅 유대사막으로 사해가 훨씬 낮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바닷가로 보이는 물 웅덩이들은 민물이 스며들어 땅이 내려앉은 곳(씽크 홀)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란다. 

 


 


성적 타락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땅 소돔의 유적지(동성애란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롯의 아내(주변에 보이는 것은 돌이 아니라 소금이다)

사해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서있다(아래에서 위를 보고 찍으니 사람의 형상이 잘 안 나타남).

 

요르단에서의 두 번째 숙소 아이비스(ibis)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여기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문명의 혜택(?) 인터넷을 할 수 있었고, 시나이 반도에서의 한국인 피랍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다들 고국에 자신의 안전을 전하느라 분주했으나, 나는 임대폰 로밍까지 해왔는데도 통화를 할 수가 없어 마음을 조금 태웠다.

 

 

 호텔에서 내려다 본 요르단의 수도 암만

 

다음날 느보산(일명 비스가산)으로 가는 길에 잠시 비잔틴 시대 요르단 최대 기독교 도시 마다바(Madaba) 성 조지교회에 들렀다. 이 교회가 주목을 받는 것은 모자이크 지도를 바닥으로 해서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소 훼손이 되었지만 이 모자이크 지도는 고대 근동지역의 지도로서 가로 5.6m, 세로 15.7m로 약 30평의 바닥을 채울 수 있는 크기라고 한다. 여기서 약 15분 거리에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고 끝내 들어가지 못한 채 숨을 거둔 느보산이 있다. 그곳에는 예루살렘, 여리고, 베들레헴 등의 지명에 따라 방향과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2~3일 거리를 40년이 걸려 여기까지 온 이스라엘, 가나안까지는 2시간 남짓이면 도달하는 거리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 것 같았다. 정상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세운 모세기념교회가 세워져 있고(지금 새로 건축 중), 교회 앞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인 ‘놋뱀’ 장대가 순례객을 맞았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판토니가 만든 작품으로 모세를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성 조지교회 바닥에 있는 고대 근동지역 모자이크 지도 모형도

 

 

느보산(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은 곳)의 명물 놋뱀

 

 

느보산에서(뒤로 여리고가 있는데 흐려서 잘 보이지 않음)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대망의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처럼 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느보산을 내려와 황량한 벌판을 달려 드디어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알렌비) 인근지역에 접어들자 모래언덕이 이어지는 구릉 곳곳에 국경을 지키는 요르단 초소들이 보였다. 킹 후세인 다리(요르단)가 알렌비 다리(이스라엘)로 바뀌며 모세의 출애굽의 목표인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섰다. 안내인이 외쳤다. "요단강입니다!" 다리 양편으로 ‘그’ 요단강이 흐르고 있었고, 비록 차안에 있었지만 나는 그 요단강을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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