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탕자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구약의 탕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14회 작성일 25-04-06 14:50

본문

구약의 탕자

대하33:10~20(703)

2025. 4/6 11:00

같은 행동, 다른 시각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머스키(Ed. Muskie)라는 후보가 토론회에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머스키는 유력한 당선 후보였는데, 이 눈물 때문에 유권자의 눈 밖에 나 결국 탈락하였다. TV 앞에서 울 정도로 마음이 약한 사람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대다수의 국민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4년이 지나고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사람들 앞에서 울었을 땐 누구도 그것을 흉보지 않았다. 지미 카터뿐만 아니라 부통령으로 지명받은 후보도 울었다. 그렇지만 머스키 때처럼 정치인의 눈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4년 동안 남성에 대한 의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4년 전만 해도 남자는 무조건 강하고 감정을 절제해야 하고, 그래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감성적인 부분까지 이해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진 것이다.

 

은 정치인의 눈물이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람의 평가가 극명히 엇갈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똑같은 눈물인데 한 때는 나약함의 상징으로 이해되었으나 이제는 감수성, 공감성의 표현(상징)으로 이해가 된 것이다. 사람의 시각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시각은 편견을 만들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신앙적인 시각, 특히 은혜의 시각으로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평가가 엇갈린 사

성경에도 평가가 아주 극명하게 엇갈린 사람이 나온다. 남 왕국 유다의 14번째 왕 므나셋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를 닮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할아버지 아하스를 닮았다. 가 왕위에 오른 때 12세였는데, 이것은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은 15년의 기간에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이어받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열심을 보인 악한 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겼다. 그는 성전에 우상을 위한 제단을 쌓고, 할아버지 아하스가 그랬듯이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아들들을 몰렉 제사에 제물로 바쳤다. , 하나님께 극도로 싫어하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 제사까지 드렸다. 이렇게 온 나라를 우상천지로 만들었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이루어 놓은 신앙개혁을 한순간에 쓸데없는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무엇이든 세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한순간이다.


 

나라를 망친 원흉

그래서 열왕기의 저자는 이런 므낫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왕하24:3~4, 참고 22:11~13,16, 23:26). 선지자 예레미야도 같은 평가를 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15:3~4). 한마디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의 원흉이 므낫세라는 것이다. 이것이 열왕기 저자나 선지자 예레미야의 므낫세에 대한 평가다.


 

회복의 모델

반면에 역대기 저자는 본문에서 열왕기 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와는 달리 그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그가 나라를 망하게 만든 원흉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를 회복하는 중요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같은 인물을 두고 이토록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역대기 저자가 그의 죄를 간과한 것은 아니다. 열왕기처럼 그의 죄악을 다 기록하고 있다(1~9). 열왕기에 나오지 않는, 범죄로 인해 그가 앗수르 군대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사실까지 소개하고 있다(11). 그럼에도 역대기 저자는 므낫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4~20). 그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곧 관점의 차이다. 열왕기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의 멸망에 초점을 둔 책이고, 역대기는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의 회복에 초점을 둔 책이다. 이와 같이 두 책의 초점이 다르다 보니 이렇게 서로 엇갈린 평가를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대기는 열왕기가 다루지 않는 부분, 곧 므낫세의 회개를 중요하게 다루게 된 것이다.


 

본문에는 지난 주일 말씀드린 역대기의 핵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 다라쉬(דָּרַשׁ)를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간구와 기도라는 단어가 그것인데, 간구와 기도란 단어가 각각 2번씩 나오고 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12,13). 그가 큰 어려움을 당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려 하나님을 다라쉬했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바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대기에 나온 선한 왕들이 보여준 한결같은 태도다. 그들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찾았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다. 심지어는 므낫세처럼 나라를 망친 원흉도 하나님을 다라쉬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즉시 회복시켜 주셨다. 이와 같은 므낫세의 이야기는 아무리 심각한 죄도, 아무리 사악한 절망적인 죄인도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의지하면, 곧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찾고 구하고 의지하는 삶

어떤 사람은 역대기를 성경의 수면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성경의 아라비안나이트라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구약의 복음서라 하고, 므낫세를 구약의 탕자라 한다. 물론 내용은 지루하나 무척 좋아하는 성경 중 하나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난 망나니 같은 자식이 돌아오자 그저 뜨거운 가슴으로 맞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여기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왕기는 므낫세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고 했다(왕하24:4b). 이토록 하나님께서 독하게 마음을 먹으셨는데, 막상 므낫세가 하나님을 다라쉬하자 곧바로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가....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선지자가 있다. 호세아 선지자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그렇다. 우린 돌아서도 주님은 변치 않으시고, 우린 넘어져도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이발사와 목사가 함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발사는 하나님이 계시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왜 이렇게 악하고 끔찍한 일이 많고, 사악한 사람이 많냐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늘어놓았다. 아마 이런 생각은 이 이발사뿐만 아니라 우리도 가끔 한다(나도 이런 생각을 하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가? 그 이유는 바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을 심판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신다면 그 1번이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꾹꾹 참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불평이 감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길을 가고 있는데, 머리가 길어 지저분한 모습을 한 사람이 그들을 지나갔고, 이를 보고 목사가 왜 이발사가 많은데 저렇게 머리가 길도록 깎지 않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발사는 그거야 그가 이발사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목사는 마찬가지로 세상이 악하고, 악한 사람이 많은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발사가 아무리 많아도 찾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보다 더 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위대해도 예외가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을 다라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여 믿음의 여정을 걷기 바란다이 길을 함께 걷는 저와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놀라지 말고, 주님께서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실 것을 소망하며 주님을 찾고 구하고 의지하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83 / 29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