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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가 빚진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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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17회 작성일 24-06-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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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가 빚진 자라.

1:13~15

2024. 6/23. 11:00(성령강림 여섯째 주일)

렌트(rent)인생

이진우 시인의빚 공화국이란 시의 첫 머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늘 모자라다.

공과금 내고 할부금 내고 은행이자 내고나면

다시 대출받아야 하는

만성적자 가계부를 집어던진 게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 백기를 든 게 언제부터인가

돌이킬 수 없는 빚은

가족이 되고

피부가 되고 뼈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남의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옷도 사고, 먹을 것도 사고,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있는 셈이다. 먹고 입고 쓰고 생활하는 것 대부분이 이다. 빚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빚꾸러기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빚도 자산이고 실력이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을 갖는 사람이 많다. 알고 보면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이기도 하다. 옛 사람은 삶과 죽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생기사귀’(), 산다는 것은 잠시 빌붙어있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본디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빌붙어 사는 존재이니 인생은 그 자체가 빚이고, 사는 만큼 빚을 지는 것이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소작인)이요 동거하는 자(나그네)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25:23).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내 몸도,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니다.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잠시 주님께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렌트(rent)인생이다.

 

거룩한 빚꾸러기

본문에서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소개하는 거룩한빚꾸러기가 나온다.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14). 강한 채무의식에 대한 고백이다. 빚을 누구에게 얼마나 졌기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일까? 물론 이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빚을 져서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주이신 우리 예수님께 진 사랑의 빚, 은혜의 빚을 말한 것이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 죄인의 괴수를 자녀로 삼으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 섬기게 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빚진 자란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은 주님의 빚을 갚기 위해 빚진 자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거룩한 빚꾸러기라고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 빚진 자의 마음, 곧 채무의식에서 그의 인생관과 사역관이 시작된다.

 

특히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는 긴급한 위기의식은 이와 같은 채무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의무이고, 갚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부담감과 긴급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복음전도에 전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채무의식, 곧 빚진 자라는 생각이 전도가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비결이라는 생각, 전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긴급한 생각에 이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생각이다. 바울은 이런 빚진 자란 생각 때문에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복음전도에 전념하였고,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했다. ‘바울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그곳이 시골이든 도시든 상관없이 그 순간부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뜻인데,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영적 채무의식이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

사실 이 영적 채무의식은 인격과 신앙의 척도다. 인격적인 사람일수록, 신앙이 독실할수록 영적 채무의식이 강하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덕분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이 채무의식을 은혜의식, 혹은 보은(報恩)의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누가 전도를 열심히 하고, 교회와 지체를 뜨겁게 섬길까? 채무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또한 이 채무의식은 사역의 자세를 결정한다. 자신이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이 없고, 불평도 없다. 그저 어떻게 은혜에 감사하고, 어떻게 보답할까만 생각한다. 이렇게 은혜의식과 보은의식으로 사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답하고 싶은 생각에서 스스로 하는 것이고,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게 된다. 남이 알든 모르든 신경 쓰지 않고, 설령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분발한다(바울을 보라!). 우리 역시 바울처럼 주님께 빚진 사람이다. 거룩한 빚꾸러기다. 사랑의 빚, 은혜의 빚, 용서의 빚을 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철저한 영적 채무의식을 가져야 한다. 황인숙 시인의이라는 시가 있다. 처음엔 이런 것도 시야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읽을수록 이런 것이 시의 매력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이것이 전부다. 얼핏 보면 시 같지도 않다. 그런데 자꾸 읽다보니 감동이 되었다. 이 시에 물음표(?)말줄임표(.....), ‘마침표(.)세 개의 문장부호가 있다. 이 시의 핵심이 글보다 이 문장부호에 있는 것 같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나타낸 것 같고, 둘째 행의 말줄임표는 삶에 대한 좌절과 절망감을 나타내고, 둘째 행과 셋째 행 사이가 띄어져 있는 것은 삶에 대한 깊은 고뇌를 시각화한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그래도 살아야 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나타낸 것 같다. 삶에 대해 좌절과 절망감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외상값’ 때문이다. 이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물론 외상값은 각자 다르다. 그래서 시인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갚아야할 외상값은 무엇일까? 악착같이 살면서 꼭 갚아야할 외상값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전도. 이 빚을 갚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 힘들어도 살아야만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이 그랬다(1:23,24). 본문에서 바울이 그토록 로마교회를 방문하고자 했던 이유(13), 얼마든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굳이 로마황제에게 항소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갔던 이유(26:32), 그가 결혼도 않고, 자비량으로 전도를 한 것도(고전9:),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전도를 멈출 수 없었던 것도(고후11:23~27), 모두 이 외상값 때문이다.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

스탠딩오더’(standing order)란 말이 있다.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계기로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던 용어다. 명령권자가 명령을 취소하지 않는 한 계속 유지되는 명령을 뜻한다. 김정남의 암살명령이 일종의 스탠딩 오더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 스탠딩오더가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 우리에게 명령하신 전도가 그것이다(28:18-20).

 

복음전도는 주님께서 그 명령을 회수하기 전까지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의무다. 전도는 스탠딩오더이기 때문이다. 한 해 우리나라에서 문을 닫는 교회가 3,000개나 된다고 한다. 하루에 8개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평신도 사역연구소대표 안창천 목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문을 닫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전도명령이 예배당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가 샘 레이너(Sam Rainer) 목사가 기고한 당신의 교회가 5년 안에 소멸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게재했는데, 샘 레이너 역시 죽어가는 교회의 첫 번째 이유로 전도를 포기한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오늘날처럼 교회와 성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아진 상황에서 전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전도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전도가 어렵고, 전도가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전도는 주님의 스탠딩오더다. 주님께서 이 명령을 회수하시기까지 수행해야 할 과제다. 그리고 전도만이 주님께 진 은혜와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는 비결이다. 뿐만 아니라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가는 오늘의 교회를 구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주님께 진 사람이다. 거룩한 빚꾸러기다. 사랑의 빚, 은혜의 빚, 용서의 빚을 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주님의 이 스탠딩오더를 빚진 자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충실하게 수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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