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가 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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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5회 작성일 26-09-27 12:36본문
‘좀 더’가 주는 착각
잠27:20
2026. 9/27 11:00(성령강림 후 열여덟 번째 주일)
조금만 더(A little more)
석유왕이자 세계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John D. Rockefeller)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회장님, 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야 정말 만족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록펠러는 단호하고 씁쓸하게 이렇게 답했다. ‘Just a little bit more.’(조금만 더). 억만장자였던 그조차도 ‘조금만 더’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욕심이 그렇다. 만족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접어 생각해 보면, 만족할 줄 모르는 이런 간절한 갈망 때문에 남다른 막대한 부를 이뤘는지도 모르겠다. 운동이나 학습에서 진짜 성장은 ‘한계’(이를 임계점이라고 함)에 부딪혔을 때 일어난다. ‘딱 1분만 더’, ‘딱 한 문제만 더’, ‘딱 한 번만 더’ 시도하는 순간이 모여 잠재력을 깨운다. 잘 아는 대로 명작이나 뛰어난 성과물은 마지막 1%의 집요함에서 나온다.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다듬는 태도가 평범함과 탁월함을 가르는 차이를 만든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조금만 더 견뎌보자!’라는 다짐이 시련을 버티고, 결국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심리적 버팀목이 된다. 이런 점에서 ‘조금만 더’는 한계를 돌파하고 성장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다.
이렇게 ‘조금만 더’라는 생각이 한계를 돌파하고 성장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순간의 이성적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더 큰 손실이나 피로를 부르는 대표적인 심리적 함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잠깐의 행복을 느끼지만, 금세 그 상태에 적응한다. 그리고 더 큰 자극과 만족을 얻기 위해 다시 ‘좀 더’를 외치게 된다. 나만의 기준이 아닌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욕망이 싹틀 때, ‘좀 더 높은 곳’, ‘좀 더 많은 것’은 끝없는 경쟁과 불안을 낳는다. 이는 마치 목적지가 계속 뒤로 물러나는 경주와 같다. ‘이것만 달성하면 쉬어야지!’ 했던 약속은 ‘조금만 더’라는 유혹 앞에 늘 번복되곤 된다. 그래서 ‘조금만 더’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아무리 채우려 해도 끝내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가 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즉, 그 마음의 욕심이다. 본문의 이런 욕망의 특징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20).
스올과 아바돈, 그리고 눈
본문에서 ‘스올’(שְׁאוֹל)은 구약 성경에서 ‘죽은 자들이 가는 곳’, 즉, 음부나 저승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바돈’(אֲבַדּוֹן)은 ‘파멸’, 혹은 ‘멸망의 구덩이’를 의미하는데, 스올과 함께 쓰여 죽음의 깊은 심연이나 거처를 강조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올과 아바돈은 역사 이래 수많은 죽음과 생명을 삼켰지만, 단 한 번도 이제 꽉 찼으니 그만 삼키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주검을 계속 받아들이는 한계 없는 블랙홀과 같다. 신약에서는 ‘무저갱’(바닥이 없는 구덩이)으로 표현하고 있다(계9:11). 끝과 바닥을 알 수 없어 결코 무언가로 채워지거나 끝이 나지 않는 속성을 상징한다. 신약의 무저갱(無底坑) 개념 역시 ‘끝이 없는 파멸’과 ‘결코 만족을 모르는 욕심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비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본문은 인간의 욕심을 이 죽음의 세계와 동급으로 놓고 있다. 욕심이 스올과 아바돈 같고, 무저갱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결코 스스로 만족 상태에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끝이 곧 영적 파멸임을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욕심의 주체로 ‘눈’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을 히브리어로 ‘아인’(עַיִן)인데, 이는 단순히 보는 신체 기관을 넘어,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들어오는 통로를 상징한다(창3:6). 사실 눈으로 보는 것은 한계가 없다. 때문에 눈을 통해 들어오는 욕망 또한 끝이 없는 것이다. 우리말 관용구 중 ‘눈에 차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눈이 채워지지 않는다.’라는 것은 아무리 채워 넣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한다. 즉, 인간의 욕망과 기대치는 끝이 없어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거나 좋은 것을 보아도 완전히 만족하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 죽음이 수억 명의 생명을 삼키고도 여전히 주려 있듯,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눈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는, 바닷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하려는 것과 같다. 세속적인 욕심을 좇는 삶의 끝에는 영적 ‘아바돈’(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결핍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공백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소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자리에 한계가 있는 세상의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영혼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는다. 프랑스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말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God-shaped vacuum이 있다.’ 물질, 명예, 관계, 즐거움 등으로 아무리 채워도 결핍이 지속되는 이유는, 채우려는 내용물과 빈자리의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존재(하나님)가 들어갈 자리에 유한한 것을 집어넣으려 하니 늘 허전함과 결핍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결핍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에서 결핍을 느낄 때 ‘무엇인가 부족해서’(돈, 명예, 능력, 지식, 사랑, 성공 등)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우리의 삶과 영혼 안에 하나님의 부재(공백)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멀어지면, 모든 것을 가져도 결핍에 따른 갈증을 겪게 된다. 그러니 결핍의 본질은 ‘없음’이 아니라, ‘비어 있음’이다.
결핍은 거룩한 초대의 신호다.
목적지가 계속 뒤로 물러나는 경주처럼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조금만 더’를 외치며 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핍에 대한 정의(定義)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어떤 정의를 갖느냐에 따라 그것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결핍도 마찬가지다. 결핍은 무엇인가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공간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결핍에 대한 정의가 이렇게 되면, 결핍에 대한 이해가 바뀌게 된다. 이제 결핍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한 신호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라는 ‘초대의 신호’로 인식하게 된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초대의 신호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부족함, 연약함, 채워지지 않는 결핍은 더 이상 삶의 실패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로 나아가는 영적인 통로가 된다. 그 결핍을 안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단순히 이성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닌 삶에서 일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고, 그 하나님으로 마음의 공백이 채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조건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만족을 얻게 된다.
결핍을 해결하는 방법은 더 많은 물질을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내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는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하실 때 비로소 환경과 물질을 초월한 참된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지금 무엇인가 어떤 결핍이나 허전함이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부족이나 결핍은 ‘착시’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 속아 ‘조금만 더’를 외치며 파멸(아바돈)로 달려가고 있다. 진짜 결핍은 영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영적 ‘허기’다. 그러므로 결핍은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의 신호다. 즉,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하나님으로 풍성함으로 향하게 하는 거룩한 통로가 결핍이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 마음이 머물고, 영혼이 깃드는 것은 인류의 오랜 지혜이자 깊은 통찰이다. 눈은 외부의 욕망과 자극을 받아들이는 유혹의 입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적인 울림과 거룩한 은혜를 받아들이는 가장 맑은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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