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지(地) 탐방6. ‘스코틀랜드 개혁의 선구자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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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7,619회 작성일 15-07-11 08:09본문
종교개혁지(地) 탐방6. ‘스코틀랜드 개혁의 선구자들’
-죠지 위샤드(George Wishart, 1513-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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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해를 1560년으로 잡는다. 이것은 루터가 개혁을 부르짖은 지 40년, 영국이 카톨릭과의 단절을 선언한 지 30여 년이 지난 후이다. 이렇게 늦어진 것은 그들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적의 적은 편이다.’는 말이 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관계가 그랬다. 스코틀랜드를 자신의 영토로 병합하려는 영국과 이에 강력하게 맞선 그들 사이는 늘 불편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동안이나 전쟁을 할 만큼 적대관계였다. 이런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이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은 것은 자연스러운 정치공학이다. 그러다보니 강력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영향력이 그들의 종교에도 영향을 주었다(탐방5. 참조). 하지만 이런 관계가 개혁에 부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때문에 칼빈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롬8:28).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패트릭 해밀톤과 함께 또 한 사람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죠지 위샤트가 그 사람이다. 그는 후일 개혁의 중심인물이 된 존 낙스를 회개시켰고, 또한 그를 개혁의 지도자로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는 에버딘 대학(스코틀랜드의 3대 대학; St. Andrews, Glasgow, Aberdeen)에서 고전어를 배운 뒤, 스코틀랜드에서 최초로 헬라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몬트로즈(Montrose) 문법학교 교장으로서 헬라어와 신약성서를 가르쳤다. 이것을 문제 삼아 당국이 그를 체포하려하자 영국으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개혁자 라티머를 만나(1538) 교제하다 후에 스위스로 갔다. 그리고 스위스의 첫 신앙고백서 「제일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영역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 귀국하여 몬트로즈, 던디(Dundee), 아셔(Ayrshire) 지방을 다니며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강해하였다. 특히 던디에서 로마서를 강해했는데, 이것이 그가 기소와 체포를 당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낙스가 개혁사상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위대한 개혁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좌측 위는 파괴된 성 앤드류스 대성당 터이고,
아래는 위샤트가 순교한 장소 표지석,
그리고 우측은 그의 순교장면이다.
결국 그는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그는 해밀톤을 화형시킨 제임스 비튼의 조카로 신교를 박멸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앤드류스 성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1546년 3월 1일 33살의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그 때 비튼은 창문을 열고 그의 고통스런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분개한 시민들이 1546년 5월 29일 봉기하여 비튼을 죽여서 그의 목을 그가 내려다보던 창에 내어걸었다. 이 때문에 제1차 스코틀랜드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탐방3, 참조). 여기서 정말 놀라운 사실은, ‘비튼이 살아서 성문을 나오지 못할 것이며, 또 치욕스럽게 죽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화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창문너머에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고 위샤트가 말했던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의로운 피를 흘리고 무사할 수가 없다.
해밀톤은 24세, 위샤트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불꽃처럼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위해, 그리고 조국의 종교개혁을 위해 살다가 주님 앞에 향기로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들은 얼마든지 화(禍)를 피할 수도 있었고,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마치 모세가 주님을 위한 수모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던 것처럼(히11:24~26) 그들 역시 일시적인 일신(一身)의 영달보다 주님을 위한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특히 위샤트는 낙스가 자신도 함께 죽겠다고 나서자 ‘개혁의 일을 추진하기 위해 다른 날을 기다리라. 희생은 나 하나로 족하다.’며 만류하였다. 주님을 위한다면서도 열정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 주님을 위한 희생과 헌신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내 모습에 큰 경종이 되었다. 이 젊은 영적 거인의 순교현장 표지석을 바라보며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불꽃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잠시 기도를 드린 다음 해밀톤의 순교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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